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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Nov 17. 2023

깍쟁이가 아니라 암환자입니다

아주 아주 가끔은 깜빡이를 생략해요

어느 날 집에서 셀프로 머리를 잘랐던 친구가 교육 관련 방문 판매를 하시는 분에게 긴 시간 영업받느라 지쳤던 일을 얘기했다. 암 걸리고 이혼하며 제법 모질어진 나의 무용담을 들려줘야 할 것 같았다. 이를 테면


1. 최소한의 공부는 하고 있다고 한사코 거절해도 업체에서 자꾸 학습용 패드를 보낼 테니 써 보고 돌려보내라고 할 때 "선생님, 제가 공부를 잘했거든요, 저도 애아빠도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공부를 참 열심히 하고 잘했는데 사는 게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애들이 학교 공부는 못해도 정말 괜찮다고 생각해요." 라며 TMI로 진심을 전한 일이라든가,


2. 보험 전화를 받고 정중히 몇 번 거절했는데도 암은 누가 언제 걸릴지 모르는 거라며 완강하게 영업할 때 "선생님 제가 실은 이미 암환자라서요, 또 걸리는 건 안 되는뎅~" 하고 암밍아웃을 해서 발신자는 다급하게 어머 죄송해요 사과하고, 나는 괜찮아요 안심시키며 통화를 종료한 일이었다.


카푸어 탈출 비결로 암 보험금 수령이라는 뜻밖의 사실을 공개했던 친구의 일화와 비견해도 숙연함에서 뒤지지 않는 내 무용담이 친구는 제법 마음에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여느 때처럼 아무 용건 없이 안부 전화를 했던 날 친구가 그렇잖아도 요즘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수영장에서 같은 타임 '고인물 언니들'이 수영 끝나고 믹스커피를 타 먹는단다. 친구는 음식을 가려먹느라 커피를 거절해 왔고. 그러다 단체로 점심을 먹으러 갔던 날 다들 술 한 잔씩 하면서 '언니' 한 분이 친구에게도 술을 권하는 바람에 친구는 또 거절했는데 언니들이 땡땡 씨는 손이 많이 간다는 둥 빈정대시더란다. 급발진이 필요한 순간.


아, 제가 항암 치료 중이라서요.

입이 잘 안 떨어지는 암밍아웃인 줄 알기에 나는 아주 잘했다고, 속이 시원하다고 칭찬했다. 계속 영업을 해야 하는 직장인도, 믹스커피랑 술 안 마신다고 고까워하는 고인물 언니들도 이해가 안 되진 않는다만 남의 슬픈 속도 모르고 자꾸만 권하면 이쪽도 상당히 곤란하기 마련. 병 걸린 게 잘못도 아닌데 숙연해질 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말하는 거, 아주 가끔은 괜찮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자조 모임 뭐 별 거 없다. 요즘 잘 지내는지, 병원이랑 운동은 잘 다니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애들 윽박지른 얘기 터놓으면서 조언을 주고받고, 가끔은 애들 먹이기 좋은 띵템이라도 공유하듯 서로의 도른도른한 짓을 나누고 깔깔대면 그게 내 자조 모임이다. 어디 가서 함부로 떠들 수 없는 암과 우울이지만 우리의 슬픔이 얼굴을 맞댄 곳에서는 놀랍게도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런 저런 사연이나 증상 있는 사람들이 하는 자조 모임 (이미지 출처=Addiction Rehap Toronto)


다음 이야기 - 항암 치료의 순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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