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서 온 남자
일정 끝나고 언니랑 창경궁 가서 갖은 오두방정 떨며 돌아다니던 중 예쁜 곳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사진 찍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떠나기를 잠시 기다리는 어색한 순간이었는데 사진 찍던 한국인 같은 여자가 갑자기 다급하게 “Una mas, una mas, solo una mas!”를 연거푸 외치길래 나도 모르게 빵 터지고 말았다. (하나 더, 하나 더, 딱 하나만 더!라는 뜻.)
여자의 긴박한 외침에 옆의 일행 같던 외국인 남자도 덩달아 웃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It’s okay, esta bien.”이라고 하는 사이 그의 일행은 사진을 다 찍은 듯 자리를 비켜 줬고, 언니랑 내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남자가 양손으로 카메라 셔터 누르는 시늉을 하면서—분명 조금 전까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Foto?” 하고 물어왔다.
얼씨구나 싶어 나도 “Si, si, muchas gratias,” 하며 함박웃음을 날렸다. 그리고는 부끄러워 사진 안 찍으려는 언니를 붙들고 온갖 알랑방구를 뀌며 둘도 없이 다정한 사진을 찍은 뒤 점잖고 멀쩡한 사람으로 돌아와 남자에게서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다신 안 볼 사람인 줄 알았는데 궁 안을 제법 걷다 하필이면 기분이 좋은 만큼 한껏 궁뎅이를 내밀고 포즈를 취하는 순간 나를 찍으려던 언니 뒤에서 아까 그 외국인 남자가 나타났다. 이쁜 척을 하다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내 얼굴을 알아본 남자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쌍으로 웃음이 터져 버렸고, 무슨 일인가 싶어 뒤돌아본 언니까지 즉시 박장대소에 합류했다. (웃음소리만큼이나 컸던 부끄러움은 나만의 것.)
길이 좁아 딱 붙어 지나가며 어디에서 왔냐 물었더니 남자는 바르셀로나에서 왔다고 했다.
“OH I’ve been there. Interesting. A very dear friend of mine flew to Barcelona today, for a holiday.” (오, 저 거기 가 봤어요. 재밌다, 친한 친구 하나가 오늘 바르셀로나로 갔는데, 휴가.)
“Really? And you liked Barcelona?" (정말요? 바르셀로나가 마음에 들었나요?")
“Muy bien. I loved it there.” (베리 굿이요. 완전 좋았어요.)
“What did you like most?”
바르셀로나에서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묻는 그 남자에게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The sunset, the orange sunset at the beach. It was really really lovely, I almost wanted to tip the sunset. And the huge shopping mall there as well.”
석양이요. 바닷가 오렌지빛 석양이요. 정말 정말 예뻐서, 석양에 팁을 주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거기 엄청 큰 쇼핑몰도 좋았고요.
남자가 크게 웃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얘기 나누면 3분 안에 빵 터트릴 수 있는 멀쩡할 때의 나는 제법 괜찮고 웃긴 사람. 매일 즐거우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