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나무다리는 아닌데, 시간과 정신의 방.
도련님이 가져다주는 택배가 불편해서 부피 작은 택배는 직장으로 받기 시작했다. 도련님의 문자가 줄었고, 마주칠 가능성도 적어졌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불편함을 거의 잊고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귀가 완료를 2분쯤 앞둔 퇴근길, 얼른 가서 애들 밥 차려 줘야겠다 하는데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게 보여 걸음을 재촉했고, 문이 열리자 남자가 화물용 초록 카트를 밀며 내렸다.
‘유니폼을 입고 있네.’
단순한 시각 정보가 처리되는 줄 알았던 그 순간 텅 빈 뇌에 번개가 번쩍였다.
‘아, 도련님이다, 도련님이 틀림없어.‘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 나는 이미 엘리베이터 안이었는데, 남자가 돌아볼까 봐 숙인 고개는 어째서인지 엘리베이터가 닫힌 후에도 들 수가 없었다. 눈이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심장이 계속 쿵쾅댔다.
결국 이런 일이 생기고 말았다. 언제든 또 마주칠 수 있다. 마련할 수 있는 대비책은 없다. 근데 나는 잘못이 없다. 그러니 불편하지 않아도 된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 일이 있고서 2주쯤 흘렀을까.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어폰 두 알을 꺼내 들었다. 위에서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릴 때는 고개를 막 오른쪽으로 기울인 참이었다. 귀 모양에 맞게 이어폰을 끼우며 발을 들여놓다가 먼저 타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형수~ 오랜만이에요~ 여기 와서 잘 지내세요?
"어~ 도련님~ 저야 뭐~ㅎㅎ 잘 지내시죠?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죽기보다는 까무러치기가 나을 것 같아 이혼하고 온 곳인지 모르는 도련님은 내 안부와 행선지를 물었고, 나는 차근차근 대답했다. 조카들을 만나야 한다며 아이들의 안부를 묻길래 애들도 잘 큰다고 대답했다.
형님은요?
애들 아빠도 잘 지낸다고 내 바람을 담아 대답했다. 식구 수대로 묻는 안부에 일일이 대답하고 나니 드디어 1층에 도착했다. 시그니엘이었으면 나는 첫 번째 질문에만 대답하고 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며 티 내고 싶지 않았던 종종걸음을 걸었다.
예정된 만남이었다. 다만 도련님의 형님은 더 이상 나와 함께 살지 않고, 도련님은 그 사실을 모를 뿐. 또 마주친다 한들 지금보다 더 불편할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 상황을 알게 되면 도련님은 택배 상자를 세게 던지고 싶어질까. 그전에 이사 가고 싶다. (택배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