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 실종 호소인이 생겼습니다
종이 쓰레기만 얼른 버리고 오려다가 문 앞에서 아빠랑 이제 막 돌아온 아이들을 마주쳤다. 왕자가 너무 슬픈 얼굴이라 내가 김왕자 왜 이렇게 기운이 없냐고 괜히 툭툭 쳤더니 공주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변인을 자처했다.
"쟤 피곤해서 그런 것도 있고, 아빠랑 헤어지기 싫어서 그래."
나도 안다. 일 년 반이 지났지만 아빠를 만나고 올 때면 왕자는 어김없이 크게 슬퍼한다. 저녁 메뉴를 일부러 편식왕 둘째도 좋아할 음식으로 챙겼고, 당면을 많이 넣은 한우 갈비찜이라고 광고를 했으나 소파에 엎드린 왕자는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또 만날 거라는 늘 하던 말로 달래자니 염치없고 무력하여 당면이나 건지려는데 공주 목소리가 들렸다.
"야, 2주 있으면 또 아빠 만날 거잖아~ 2주마다 보는 거면 잘 보는 거야. 나는 이게 딱 좋은 거 같애. 내 친구 중에는 거의 잘 못 보는 애도 있대~!"
엄마 아빠 이혼했다고 자기들끼리 커뮤니티라도 꾸린 걸까. 저런 카더라는 어디서 듣고 왔나 싶어 물었더니 가끔 친구들이 얘기하는 걸 듣는다며 정작 본인은 이번 학년에 새로 만난 친구들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단다.
그 말에 어느 봄날 공주 책상 정리하다 발견한 학교 질문지가 생각났다.
Q. 가족은 무엇인가요?
A. 나를 사랑으로 보호하는 게 가족이에요.
Q. 나에게는 비밀이 있나요?
A. 나는 엄마와 아빠가 따로 살아요.
자신의 불편한 비밀이 현재진행형인 채로 동생을 달래는 누나의 위로가 통했는지 왕자는 마침내 갈비찜을 먹겠다고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고기를 뜯는 둥 마는 둥 이내 다시 멍을 때렸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엄마, 나는 아빠 생각 때문에 입맛이 없어.
어머어머~ 아빠 생각이 나는데 왜 입맛이 없숴어~ 아빠 생각이 나면 밥을 더 잘 먹어야즤이~ 하고 주접을 떨었지만 왕자는 아빠가 보고 싶다며 눈물까지 훔쳤다. 차라리 그냥 너가 그래서 너무 슬프구나, 맞장구를 쳐서 엉엉 울게 하고 넘어갈 걸 그랬나도 싶었다.
다음에 아빠 또 만나면 된다고 아빠랑 뭐 하고 놀았냐, 브롤스타즈 했냐 물었더니 갑자기 왕자 얼굴이 아주 밝아졌다. 로블록스도 했다면서 엄마랑은 못하는 걸 아빠랑 하고 와야 되지 않냐고 반문도 하길래 맞다고 엄지 척을 해 줬다. 좋아하는 활동 얘기로 화제를 전환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는구나, 이번에 또 배웠다.
어찌어찌 밥을 다 먹이고 일용할 공부와 양치까지 시켜서 일과를 마무리하는데 책상 위에 펼쳐진 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빠집에 다녀온 아이가 겪는 슬픔은 내가 아이들을 처음 아빠집으로 떠나보내며 느낀 쓸쓸함과 결이 닮았다. 아빠집에 잘 다녀오리란 걸 알면서도 허전함을 피할 수 없었던 엄마처럼 이 꼬마 녀석 역시 2주 후면 아빠를 또 만나는 줄 알면서도 슬픔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나 보다.
그래도 상담사 선생님이 왕자는 아주 잘하고 있다고 하셔서, 왕자를 만나는 시간이 선생님의 힐링 시간이라고 해 주셔서 안심했다. 처음에는 많이 슬펐는데 이제 좀 익숙해졌다고 스스로 얘기했다는 쓸데없이 의젓한 나의 1학년 꼬마는 엄마랑 아빠가 옛날에는 많이 싸웠는데 이제는 안 싸운다고도 했단다.
두통약 먹을 때처럼 금방 낫는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마음에 난 상처는 참 천천히 낫는다. 그러니 슬픈 마음을 충분히 잘 헤아려 주며 기다리는 일은 나 자신에게도, 어린이들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다. (이제 곧 방학이라 큰일이 난 건 어떻게든 수습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