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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Oct 14. 2024

면접교섭일의 고구마

고구마를 열 개는 먹은 느낌

쌍화탕을 데우며 일요일 아침을 맞았다. 일주일 넘게 몸살 기운이 안 떨어지길래 한의원에 가서 등 좀 지지러 왔어요, 하고서 받아온 쌍화탕이었다. 아이들 오기 전에 잘 쉬고 집안일도 해야 하니 몸부터 잘 챙겼다. 벌써 두 번은 본 <스테이지 파이터>를 틀어놓고 선물 받은 담요 세 개를 세탁기에 돌린 후 냉동고에서 이따 쓸 닭가슴살과 돼지목살을 꺼냈다. 그리고는 티백 두 개 넣은 밀크티를 만들고, 통밀빵에 후무스를 얹어 늦은 아침을 먹은 후 담요를 건조기에다 옮기고 운동 가방을 챙겼다.


골치 아플 땐 운동이 최고라서 오랜만에 중량도 치고 달리기도 하는데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가끔 가는 돈가스집 이름을 묻길래 아빠랑 맛있게 먹으라고 알려주고는 장 봐서 집에 왔더니 중문 앞에 고구마 한 상자가 있었다. 출처가 너무 분명한 고구마였다. 딸에게 전화를 하자 아이는 내가 고구마를 봤는지 물었다. 할머니가 어제 캔 고구마라서 좀 말려야 한다고 했단다. 전화를 끊고서 가지런히 정리된 고구마를 하나하나 헤집어 성냥개비 한 갑 쏟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라며.


빈 김치통을 그냥 돌려보내기 민망해서 과일로 채워 보낸 게 두 달 전이었다. 여름에는 햇감자도 한 상자 받았다. 할머니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할아버지 고구마가 최고라고 하는 손주들에게 햇것을 보내시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혼을 한 탓에 선물 받고 마음 어딘가가 고구마 먹은 듯한 건 어쩔 수 없다. 당신 아들을 이혼남으로 만든 (구) 며느리네 집으로 고구마를 보내는 마음은 어떨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든다. 평소엔 주차장에서 잘 올라오지도 않는 나의 집으로 무거운 고구마며, 감자 같은 걸 배달하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지도 말이다.  

 

운동 가기 전에 고구마가 왔다면 능률이 엄청 올라갔을 텐데 하며 쓴웃음이 났다. 위스키 병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어제 애들 먹이고 남은 새우볶음밥을 꺼내서 스리라차 소스를 마구 뿌렸다. 밥을 잘 먹고 식세기까지 돌리고 나니 운동 여파인지 너무 졸리길래 건조기에서 새 담요 하나를 꺼내 소파로 가 잠을 청했다. 이따 요리를 하고 분리수거도 하려면 피곤해선 안 된다, 오자마자 아빠가 보고 싶다고 눈물 흘릴 둘째를 잘 달래려면 내가 충전을 잘 해 둬야 한다는 좋은 구실 덕분에 편하게 게으름을 피웠다.  


나는 꿀잠을 자고 일어나 계획대로 카레를 하고 찌개를 끓였다. 쓰레기도 버렸다. 울상을 한 꼬마가 집에 들어오며 아빠가 보고 싶다고 구슬프게 흐느낄 때도 아빠랑 아주 잘 놀고 왔나 보다, 하며 팔 벌려 안아 주고 달랠 기운이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작은 등짝을 토닥이는 동안 아까 헤집어 놓고 옮기지는 않은 고구마 상자가 자꾸 눈에 밟혔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이혼하고 고구마를 벌써 세네 번 넘게 받았는데 받기만 했으니까. 그렇잖아도 고구마를 주문하려 했는데 타이밍이 제법 좋았으니까.


애들 아빠가 반달이 된 지도 어느덧 2년. 보름마다 돌아오는 아이들 면접일이 반가웠고, 면접일을 기다리는 나라는 엄마가 싫기도 했고, 막상 떠나보내면 허전한 양가적 기분이 들어 씁쓸하기도 했다. 여러 순간들이 그동안 잘 지나갔다. 면접 의지가 없는 비양육자들도 있는데, 자녀가 보고 싶어 해도 아빠나 엄마를 보여줄 수 없어 속상한 양육자도 보았는데 그런 어려움까지는 모르고 살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러니 가끔 고구마 받고 드는 고구마 먹은 느낌 따위 앞으로도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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