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 이혼을 비밀로 해야 할까?
어디선가 부모님에게 이혼 사실을 비밀로 해야 할지 묻는 글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을 수 있겠고, 가족들이 날 선 말을 자주 하는 편이면 말을 아낄 수도 있을 듯했다. 아니면 어린 자녀가 없어서 애들 입에 재갈을 안 물려도 된다거나. 식구 중에 유산기 때문에 절대 안정이 필요한 사람이나 중환자가 있는 경우에도 당분간은 소식을 알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착해 빠진 사람이 아니고, 식구들 중에도 못돼 먹거나 아픈 사람이 없는 덕분에 나는 살기 싫다는 넋두리와 이혼 과정을 가족들에게 공유했다. 그렇다고 우리집 식구들이 오은영 박사님한테 박수받을 모범적인 관계라거나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아니다. 밖에서는 잘 쓰는 사회적인 가면을 식구들한테는 종종 냅다 벗고 대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이런 일도 있었다. 동생이 작년에 나랑 아이들이 다니는 미용실에서 펌을 했었는데 내가 오랜만에 미용실을 찾았더니 사장님이 동생 머리는 자리를 잘 잡았냐며 물었다. 나는 단톡방의 뒤통수 사진을 보여 주며 안부를 전했다. 동생이랑 사이가 좋은가 보다는 사장님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 "꼭 그렇진 않지만 안 친한 집보다는 잘 지내는 것 같아요."라고 했더니 사장님이 웃으면서 동생도 그때 같은 물음에 "그럭저럭 지낸다"고 답했단다.
피차 좋아 죽지도 않고, 단점도 많이 알고,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는 순간도 많겠지만 가족이라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이혼을 결정한 후 이를 진행하는 처음 순간부터 끝까지 친정 식구들에게 기댔다. 결정은 오롯이 내 몫이었지만, 내가 이것을 해낼 수 있겠다고 믿도록 버팀목이 되어 준 소중한 사람에는 나의 오랜 친구들, 나를 자신들 인생의 의미 있는 소중한 존재로 생각해 준 벗들 이전에 친정 식구들이 있었다.
나는 가족이나 부모님에게 이혼을 숨길 이유가 전혀 없었다. 허락을 받고 진행할 일도 아니었거니와 이런 큰일을 겪는데 가족에게 지지받지 않는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아빠가 정치인이거나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당시 부모님께 상당히 죄송했는데, 아빠는 내가 힘든 걸 몰라 줬다며 오히려 미안해하셨고, 내 마음 편한 게 제일 중요하다고 마음을 덜 불편하게 해 주셨다.
식구들 중 돈이 있는 사람은 금융치료를 자청했고, 시간이 있는 사람은 우리집에 와서 가사와 육아를 거들어 줬다. 말동무가 되어 줬다. 큰 도움이 된 변호사도 가족을 통해 소개받았다. 이혼 신청 후 3개월이 지나 판결문을 받으러 가야 했던 날에는 엄마가 올라와 주셨고, 마침 방학이던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가 내가 내 몸 하나만 건사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아이들 없는 주말이면 동생 방 한편에 몸을 누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 이혼이 열렬한 지지를 받았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특히 엄마는 끝까지 내가 이혼하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셨다. 딸이 이혼녀가 된다는 사실이 속상하셨는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주들이 아빠(가 거의) 없이 자란다는 사실이 안타까우셨는지, 식구 중에 돌싱 같은 것이 생겨서 슬프셨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54년생 모 여사가 남이 아닌 내 엄마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당연한 바람이라 생각한다.
지난 2년 동안 뜻하지 않게 엄마가 내 이혼 사실을 숨기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이를 테면 이모의 전화를 받고 도비네가 왔다는 말을 하며 "김 서방은 바빠서 같이 못 내려왔네." 하고 말하는 식인데, 어떨 때는 이혼했다고 말하지 말라며 나에게 정확히 오더 내린 일도 있었다. 동생 결혼식장에서 이혼 소문이 날 것을 걱정하셨던 것 같다. 나를 반기며 인사하러 오는 친척들을 보면 심장이 콩닥거렸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겪어 본 적 없는 순간을 수차례 지나는 동안 내가 믿고 기댔던 점은, 친정 식구들이 나의 이혼을 지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내 이혼을 부끄러워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었다. 내가 남은 인생을 어떤 모양으로 살아가든, 그것이 이혼한 여자로든 그렇지 않은 여자로든, 이 사람들이 나의 안녕과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이며 내가 절박하고 절실한 순간에 나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친구들에게는 말해도 가족한테는 차마 입을 뗄 수 없는 나쁜 사건, 사고가 있다. 처음에는 남편과의 관계도 그런 일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진짜 큰일이 나니 가족한테 말하게 되었다. 사람마다 상황은 다르겠지만, 가족에게 이혼을 말하지 못하는 처지의 사람도 있겠지만 저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잘 결정하면 좋겠다. 나는 다시 이혼하더라도 (응?) 가족에게 말을 또 할 생각이다.
나는 전에도 식구들에게 고마운 점이 많았지만, 이혼하고 나서 식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와 사이가 나쁠 수 있고, 만나면 서로 비난하기 바쁠 수도 있다. 건강이 안 좋으셔서 나쁜 소식을 전하기 두려울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애초에 왕래가 없다거나 여러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힘든 일을 나누고 위로 받으면 좋겠다. 시차를 조금 두고라도 말이다.
어린 자녀가 있다면 이혼을 숨기기 어렵다.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 이혼한 거 비밀이야."라며 거짓말을 시키는 일을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이 불행하거나 부끄러운 일이라고 인식시키고 싶지 않다. 이혼 사실을 공유하면 적어도 가족이라는 비교적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는 아이들이 더 챙김 받고 위로 받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러지 않을 수도 있고, 과하게 허용을 받다가 비뚤어질 수도 있으나 그건 이혼하지 않아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제가 토요일에 글을 올린 줄 알았는데 안 올렸더라구요? 방학... 또르르.... 연재에 멱살을 맡기면서도 큰 스트레스 없이 쓰려는 중이니 편하게 봐 주세요 :)
벌써 1월 하고도 6일이네요.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꼬마들 방학을 맞이한 어머니 아버지는 특별히 새해 복 더 많이 받으시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