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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Dec 28. 2024

이혼 소식, 어디까지 알려야 할까?

제정신이 있을 때 생각해 보자

쪽파 같은 스프링 어니언(spring onion)과 덩치만 큰 릭(leek) 뿐인 외국에서 밥 해 먹고 살던 어느 날, 문득 파개장을 끓이려다 한국의 대파 향이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은 적 있다. 조그만 더 떠올리면 생각이 날 듯도 한데 내 손 안의 채소 냄새랑 다른 것만은 확실했고, 통 그 향이 떠오르지 않아 아쉬웠다.   


살기가 싫어 괴로운 와중에도 그게 틀린 선택이라고 판단했던 지난날, 까무러치는 셈 치고 일단 이혼부터 해 보자 마음먹었더랬다. 짱구를 굴리다 결심은 했지만 <혼자가 아닌 싱글맘>에도 썼듯 "반듯해야 해서 지금껏 그렇게 살아온 나는 곧은 선에서 벗어날 때가 가까워오자 벼랑 끝에 선 듯 무서웠다."(154쪽)


제정신이 뭐였더라 싶은 나날이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뭐가 되었든 지금의 상태가 제정신이 아닌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매일 바닥 없는 늪에 빠진 듯했고,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화산이 된 것도 같았다. 무상함과 무망감, 괴로움과 슬픔을 이겨내야 했으니 떠도는 정신과 가라앉는 마음을 묶어둘 닻과 같은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나는 이혼이 시작되기 전부터 혼자 노트북에 써 내려가던 일기 중 몇 편을 친구들에게 보냈다. (정신줄을 놓고 썼는데, 제정신이 돌아온 듯한 지금은 안 읽는다.) 내가 소식을 공유한 오랜 친구들은 다음과 같다.


- 내가 자기 목숨을 두 번 구해 줬다고 말하는, 학생 시절 입덧과 중절의 순간에 내가 함께해 준 친구

- 십오 년 넘게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내 생일을 축하해 준 친구

- 독서 모임에서 만나 외국에서도 연락하며 지낸, 교회 목사의 아내이자 화가이자 상담가인 친구

- 고등학생 때 룸메로 지냈거나, 같은 학원 다니다가 모두 서울로 대학 가서 연락하며 지낸 고향 친구들


심리학자 다이애나 포샤는 "회복력의 뿌리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이해해 준다는 느낌, 그리고 애정이 넘치고 상냥하고 침착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자기가 자리한다는 느낌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사람을 안다는 것>, 24쪽) 내 친구들은 포샤가 말한 회복력의 뿌리로서 그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해 줬다.


일기를 읽고 친구들은 놀라움을 표했고, 실화냐고 물었으며, 글을 너무너무 잘 썼다고 감탄하면서도 나를 걱정해 주고 틈틈이 안부를 물어왔다. 답답하고 두려워서, 혼자 있기가 무서워 연락하면 얘기를 잘 들어 줬다. 금융치료를 해 줬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인생을 말아먹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게 해 줬다. (궁금하면 한 번 클릭해서 읽어 보시라.)


약점을 공유하는 일은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도 하지 않는 게 좋다고들 한다. 그러나 무려 이혼을 하느라 제정신이 희미했던 나는 내 개인의 정서적 필요에 의해서 신뢰할 수 있고, 내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아주 적으며 설령 뒤에서 따로 내 얘기를 하더라도 악의를 품을 이유는 없는 소수의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실용적 필요에 따라 직장에서는 상사에게만 소식을 전했다. 가정 내 유일한 양육자가 되면서 유사시에 돌봄에 뛰어들 수 있도록 양해를 구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고 지금도 좋은 결정이었다고 평가한다. 다만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내가 후회한 점은 이혼 경위를 공유한 것인데, 배려를 잘 받았지만 다시 이혼한다면(응???) 그냥 사정이 생겨서 이혼한다고만 말하고 싶다.


만약 내가 비양육자였다면 직장에 이혼 사실을 밝히지 않을 것도 같다. 입방아 찧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괜히 먹이를 제공하지 않는 게 현명할 테니까. 양육자여도 나 대신 아이들을 돌볼 조부모님이 가까이 있다면 상사에게는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 정도로만 말할 것 같다.

 

한양대 신소재공학과의 일명 '상황이 좋지 않은 교수님'.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에둘러 말하기를 추천한다.


우선 내 개인의 정서적, 실용적 필요에 따라서는 친구들과 직장의 아주 좁은 범위에만 이혼 사실을 밝혔다. 이 외에 나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이혼 사실을 말한 일이 있다. 바로 학교와 어린이집의 담임 선생님들. 이제 막 이혼했으니 혹여 아이들에게서 어떤 특이점이 보이면 살펴보고 알려 주십사 부탁했다.


색안경 끼고 보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고, 아이들이 상당 시간을 보내는 주요 기관인 만큼 고민 끝에 말씀드린다고 말했다. 안 그러시겠지만 가족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아이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형태의 다양성을 언급해 주십사 하는 부탁도 드렸다. 진상 맘충이 안 되도록 나름 주의도 했다.


학기 초에 만난 선생님들은 다행히도 다정했고, 아이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칭찬 한 마디라도 더 신경 써 주는 것 같았다. 사실 잘은 모르겠다. 그냥 칭찬에 후한 선생님들이었는지, 이혼 직후의 아이들에게 그런 말이 더 크게 와닿아서 좋은 말을 들으면 그 사실이 집에 있는 나에게까지 잘 전달이 되었는지.


다만 나는 이혼을 선생님들에게 알려서 아이가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또 이혼하더라도 이 결정에는 변함이 없다. 학년이 바뀌고, 어린이집이 초등학교로 바뀌었을 때도 나는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상담 시즌에 듣기로는 내가 해 준 것에 비해 아이들이 잘 자랐고 잘 지내 줘서 감사할 따름이다.  


이혼을 진행하고 이혼이 끝났던 그 반년 동안 내 이혼 소식을 들은 사람들과 2년이 지난 지금, 범위에 별 차이가 없다. 되게 가깝지 않았는데 어쩌다 안부 연락을 받고 근황을 전했다거나, 충동적으로 이혼 소식을 먼저 전한 적도 조금 있는데 이 경우는 나중에 후회가 되었다. 잠깐 참고 말을 아낄 걸 하고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걱정하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걱정보단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내 근황을 묻는 듯도 했다. 내가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는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등의 관심이 불편하거나 부적절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어떤 소식을 알릴 때 제정신을 챙기는 게 이래서 중요하다. 흘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으니까.


이혼 소식 알릴 범위를 정할 때는 그러니 메모장에 정리를 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첫째는 내가 정서적 지지나 실용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가족과 지인, 직장의 누군가, 그리고 둘째로는 아이들을 위한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기관의) 누군가. 정답은 없지만 본인 마음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그리고 범위는 일단은 최대한 좁게 정하면 좋겠다. 나중에 내가 마음을 잘 추스른 후에 소식을 더 전할 수는 있겠지만, 일단 얘기를 하고 나면 취소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 물론, 이런 범위 따위 생각할 일이 전혀 없는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겠다. 다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면 좋겠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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