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K3 차주와 경찰서
“아유, 젊은 여성분이 이 밤에 어떻게 여길 오셨어요?”
경찰 같은 어르신이 묻길래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교통사고 신고하러 왔어요. 제가 과실 100 가해자예요. 그리고 저 별로 안 젊은뎅.”
젊은 여성분이라는 말이 어쩐지 거슬려 그렇게 젊지는 않다고도 말했다, 물론 웃으면서. 그러자 그 어르신이 다시 말했다.
“여기는 경찰청인데. 제일 상급 기관이라서 그런 거는 여기서 신고 안 하고 경찰서에 가서 해야 하는데.”
“아, 그래요? 제가 경찰청 홈페이지에서 검색하고 전화로 지금 가도 되는지 확인도 하고 출발한 거라서 여긴가 싶었는데 잘못 왔나 보네요.”
“어디로 전화하셨는데? 줘 봐요, 제가 한 번 통화해 보게.”
어쩐지 일이 좀 커지는 불편한 느낌.
“여보세요? 아, 저 ㅇㅇ경찰서 서장 했던 누구라고 하는데요, 여기 젊은 여성분이 교통사고 신고하고 싶다고 지금 경찰청으로 왔는데. 이 번호로 전화하고 왔다고 해서요.”
그러더니 여성분을 에스코트할 경찰차를 한 대 보내달라고 하시길래 옆에서 듣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저 제가 네비 찍고 갈게요. 따로 데리러 나오시면 괜히 수고만 늘고, 남이 운전하는 차 따라가는 게 더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제가 그냥 갈게요, 괜찮아요.” (소곤소곤)
그리하여 경찰청에서 인근 경찰서로 이동한 후 어떻게 오셨냐는 말을 또 듣고서 나는 자동응답기처럼 대답을 출력했다.
“교통사고 신고하러 왔는데 제가 과실 100 가해자예요.”
대체 뭐하는 여자인가, 하는 그런 눈빛.
“교통사고 신고하고 마디모 신청하려고요.”
(마디모: 자동차 사고를 시뮬레이션하여 인체 상해 정도를 예상하는 소프트웨어로 교통사고 시 과다하게 치료비를 청구한다는 등 억울할 때 공정하게 정확한 피해를 측정하여 보험료 할증을 줄여주는 프로그램.)
“아, 마디모 신청하려고 오셨구나.”
“네, 제가 시속 5킬로로 받았는데 상대 차주가 대인 접수 안 한다고 했다가, 해 달라고 했다가, 자꾸 문자로 전화로 띄엄띄엄 말을 바꾸면서 이상하게 나와서 괘씸해서 신고하려구요. 너무 경우가 없고 자꾸 제 일상을 건드려서, 제가 원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제 이런 것도 한 번 해 보려고요. 안 참으려고요. 저 경찰서도 처음 와 봐요.”
당직 중이던 조금 나이 드신 분이 아리송하다는 얼굴로 젊은 경찰분께 거 서류 좀 달라고 했고, 젊은 경찰분은 내가 작성할 종이를 주시고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난 사고인지 알려 달라셨다.
“제가 신호 대기 중이던 K3를 어떻게 하다가 발이 브레이크에서 살짝 올라와서 받았는데, 근데 차주가 처음에는 범퍼 살짝 벗겨진 거 도색 비용으로 한 30만 원만 받고 보험 처리 안 하려고 해서 제가 알겠다고 했거든요. 병원 안 가셔도 되냐고 물으니까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계좌번호 받아서 입금 막 하려는데 그 사이에 누구랑 전화를 하더니 보험사를 부르자고 해서 양쪽 보험사가 다 왔어요. 근데 직원분들 와서 서류 쓸 때만 해도 자기는 대인 처리는 안 받을 거라고 체크했더라구요. 몸이 괜찮았다는 거죠. 근데 다음 날 아침에 전화가 오고, 또 문자가 오더니 갑자기 몸이 너무 안 좋다고 대인 보상을 해 달라고 하는데, 근데 웃긴 게 상대 차주가 저랑 난 사고가 그날 두 번째 교통사고가 났던 거였어요.”
경찰분도 신기했는지 눈을 크게 뜨면서 되물었다.
“하루에 교통사고가 두 번 났다고요?”
“네, 저랑 사고 나기 전에 같은 날 다른 차랑 사고가 났었는데, 그 차랑은 앞에 왼쪽 범퍼를 받았더라구요.”
“그 사람도 참 그러네.”
"그쵸? 그래서 제가 로또 사 보시라고 했어요. 암튼 그러니까 차주가 아프면 그 사고 때문에 아픈 거란 말이에요. 저는 진짜 살살 박았는데. 도색도 진짜 진짜 조금 벗겨지고."
“제가 박아서 미안한 건 미안한 건데, 너무 속이 빤히 보이잖아요. 물론 돈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너무 이해가 되지만, 그럼 처음부터 아프다고 하든지. 대인 처리가 치료 목적이면 이전 사고 건에서도 충분히 받을 수 있고, 따로 보상도 나오는데 자꾸 저한테 문자로 전화로 귀찮게 하니까 너무 싫어서요. 첨엔 자기 몸 괜찮다, 그다음 날에는 대인으로 치료받고 싶다, 그러다 다음 날엔 몸이 괜찮아져서 안 받아도 되겠다, 그러다 또 받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그거 보험사에다가 얘기를 하면 되는데.”
“그러니까요!!"
속상함이 터져 나와 그만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고 말았다.
"제가 안 그래도 정말 말도 안 되게 황당한 교통사고를 내고서는 너무 자괴감이 심하게 올라왔거든요. 교통사고 낸 것도 처음이고 애들도 태우고 있어서 애들한테도 너무 미안하고 마음 불편했는데. 그리고 차주님한테 사과도 잘했는데 자꾸 문자로 전화로 연락 와서 너무 싫었어요.
제가 그날 사정이 이만저만했다고 공손하게 답장하니까 그다음 날 문자 와서 자기 이제 몸 괜찮다고, 대인 접수 안 할 테니 저더러 몸조리 잘 하랬거든요. 주중에 보험사 직원이랑도 그렇게 다 정리했는데 일주일이나 지나서 또 문자가 오더니, 아무래도 대인 처리를 해야겠다, 그리고 자기는 그날 저녁에 출근 늦게 해서 손해를 보았으니 그 보상이라도 받아야겠다고 하더라구요.”
“목적이 있네잉."
누가 봐도 뻔한 차주님의 속내였다.
“그쵸? 근데 사람이 뭐 그럴 수 있잖아요. 어쨌든 제가 다 잘못한 거고, 그 사람 마음도 이해는 되는데, 너어어어무 짜증이 나서요. 아니 그리고 갑자기 보름쯤 지나서 갑자기 사고 당일 출근을 운운하니까. 이 사람이 해 달라는 걸 해 주기가 싫어져서, 그냥 차주님 일급을 알려 주시라, 제가 보상하겠다, 그리고 원하시면 직장에도 제가 선생님의 근태 평가에 지장이 없도록 소상하게 사정을 말씀드리고 사과도 하겠다고 그랬거든요?
근데 답장이 한참 없더니 오늘 또 연락이 와서 자기가 대인 처리를 강행하겠다고, 제가 동의 안 하면 가능한 방법은 1, 2, 3, 4가 있고, 4가 저를 경찰에 신고하는 거라는데 이거 완전 협박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이 사람을 먼저 신고해야겠다 싶어서 퇴근하고 바로 여기로 온 거예요.”
그러자 나이 든 경찰분이 말했다.
“과실 100인데 와서 신고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아요. 하나도 없는 것도 아니지만. 가끔씩 오기도 해요.”
“저처럼 이상한 사람이 또 있다니 반갑네요. 암튼 그 차주 그렇게 다치지 않았어요, 분명히. 제 과실로 사고가 난 건 미안하고, 대물 보상은 진작 종료되었고, 그분은 사고 나자마자 차 렌트해서 제 보험사에 청구하고, 보상 다 받았어요.
근데 다치지도 않은 일 가지고 자꾸 전화랑 문자가 와서 제 일상을 해치고, 또 해치고 그러니까 너무 괘씸해서, 이제 협박까지 하니까 혼내주고 싶었어요.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암튼.”
그러자 젊은 경찰분이 단호하게 말했다.
“차단하세요.”
“아, 그래도 괜찮아요? 그래도 그건 좀…….”
단호하게 끊을 줄 모르고 끌려다니던 내 평생 습관이 어디 그렇게 쉽게 없어질까. 차단이라니, 그런 건 평생 해 본 적이 거의 없는 걸. 고민하려니 내 불확신이 얼굴에 다 보였는지 젊은 경찰분이 다시 말했다. 차단하고 보험사 통해서 얘기하면, 신고 후에는 차주가 알게 되지만 내가 따로 차주와 연락 받을 일 없을 거라고.
“제가 내일 연락해서 그쪽 얘기 들을 거예요. 블박 영상 저한테 보내주시겠어요?”
“네, 선생님. 그리고 원래 마디모는 자차 블박 영상만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상하게 딱 제 사고 충격 부분만 블박 영상이 날아가서 지금 보내는 건 상대 차주 영상이에요. 도로교통공단 쪽에 연락해서 그쪽 CCTV 영상 받을 수 있는지 혹시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이쪽 일 하는 지인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요. 그리고 이 사람이 계속 말 번복하면서 문자 보낸 것도 같이 보낼게요.”
“네, 같이 보내 주세요. 그리고 마디모는 원래 원본 영상 아니면 안 되는 거예요.”
“알아요. 지인이 말해 줬어요.”
젊은 경찰분이 아는데 왜 이러냐는 눈빛을 보내더니 핸드폰에 도착한 영상과 사진을 확인하며 컴퓨터 앞에 가 앉았다. 나는 왜 이 밤에 경찰서를 찾았는지, 왜 그래야 했는지 설명했다.
신고 한 번 해 보고 싶었어요.
제가 옛날 같으면 상대가 원하는 거 그냥 다 해 줬을 텐데, 선생님, 제가 원래 착하게 살았거든요, 나쁜 짓 안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좋게 좋게 하면서요. 학교 다닐 때도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하게 살았는데, 근데 살아 보니까 그게 제 인생에 아무 도움이 안 된 것 같아요.
제가 남편을 한없이 배려하며 십 년 동안 학바라지 하고 애들 혼자 키우면서 힘들게 살다가 어느 날 암이 생겼대서 암 수술을 하고, 몸이 여기저기가 안 좋아지고, 고생을 상당히 했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안 살려고요.
사고 났던 날도 제가 사흘 뒤가 암 정기검진 받는 날이라 긴장해서 소화도 잘 안 되고 배가 아파서 엄청 조심조심 운전했는데. 톨게이트 빠져나오고 집에 다 와서 긴장이 풀렸는지 암튼 불상의 이유로 브레이크에서 발이 살짝 떨어진 거예요. 차주님한테도 죄송하다고 진심으로 사과를 했는데, 사람을 이렇게 호구 만들려고 자꾸 말을 번복하고 귀찮게 하니까, 더는 호락호락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사람이 착하게 사는 게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정말. 그래서 제가 본성을 거슬러서 신고를 하러 왔어요. 과실 100프로 가해자 주제에 이런 미친 신고를 하러 왔어요, 제가.”
조용한 경찰서에서 미친 여자가 되어 앓는 소리를 늘어놓다가 눈물이 찔끔 나려고 했지만 나는 잘 참았다. 다만 경찰서 공기가 조금 숙연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이 많은 경찰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보니까 우리 선생님이 남한테 해 끼치면서 살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았어요. 운전도 조심조심할 거 같고.”
“쫄보긴 한데 그래도 밟을 때는 밟기도 해요. 저 지금도 급발진했잖아요, 선생님ㅎㅎ”
결자해지라고 하지 않는가. 숙연해진 무거운 공기를 뻥 걷어내는 것도 내가 했다.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니 컴퓨터 앞에서 한참 뭔가를 열심히 하던 젊은 경찰분이 종이를 들고 오며 말했다.
“교통사고 신고는 접수 다 됐구요. 마디모는 원본 영상 아니면 접수 자체가 안 되는 건데 제가 지금 접수할 수 있게 조치했어요."
놀라운 말을 한 젊은 경찰분은 혹여 판단 불가라고 회신이 올 수도 있는데 그럼 나에게 유리한 게 없다고도 알려줬다. 그래도 그분 보기에도 부상 입어 치료받을 속도는 아니라서, 일단 마디모 신청이 되게 해 놨으니 결과 나오면 연락 주겠다고 1-2주 걸린다고 했다.
요행이라 부를 수 있는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세상에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없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밤에 경찰서에서 또라이처럼 굴지 않았어도 원래는 안 되는 접수가 되도록 경찰분이 애를 써 주셨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는 기뻤고, 후련했다.
외출 준비 중인데 모르는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김도비 님이시죠? 여기 꽃밭 경찰서인데요,”
“아 네네.”
“전에 사고 담당했던 경찰이에요.”
아, 완전 잊고 지냈는데 젊은 경찰분 얼굴이 떠올랐다.
“전에 마디모 신청한 거요, 국과수에서 회신이 왔어요. 부상 가능성 낮음이라고요.”
“오오오- 부상 가능성 낮음이면 저한테 좋은 거죠?”
“그렇죠. 제가 더 빨리 연락드려야 했는데 집에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연락드리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혹시 아내분 출산하셨나요? 카톡에 만삭 사진 찍으신 거 봤는데ㅎㅎ”
“아, 네, 그래서 회신은 더 일찍 왔는데 알려 드리는 게 조금 늦어졌습니다.”
“괜찮아요, 경찰서 다녀온 거 잊고 있었는데 좋은 소식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그 상대 차주한테도 제가 이제 연락할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는 이 결과를 전달받고 대인 접수를 포기할 수도 있고요, 이 회신에도 불구하고 보상이 욕심이 나면 대인 접수를 강행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국과수 결과가 부상 가능성 낮음으로 나왔기 때문에 대인 접수가 들어가고 보상을 하게 되더라도 보험사 측에서 지불하는 거지, 선생님은 책임을 안 지셔도 되는 거예요, 부상 가능성 낮음으로 나와서요.”
“선생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그 차주분은 엿 좀 달달하게 드시면 좋겠네요. 앗. 죄송해요.”
아빠가 된 지 이제 막 일주일이 된 젊은 경찰분은 이 결과가 상대 차주와 보험사에 다 전달이 되면 이후 어떤 절차가 어떻게 진행이 될지를 상세히 설명해 주셨고, 나는 알겠다고 다시 감사 인사를 했다.
K3 차주는 얼마나 쪽팔릴까. 한껏 쪽팔리고 한껏 나를 재수 없어하면 좋겠다. 나는 이제 길을 가다 K3만 보면 지금은 차단해 버린 그 차주가 생각날 것이다. 그의 속물 됨과 나의 또라이 됨을 기억할 것이다. 미친 내가 마침내 쟁취한 영광스러운 승리가 또 생각날 것이다.
평생 해 보지 않은 일을 내가 해냈다. 이제 또다른 발칙한 일을 할 용기가 조금 생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