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태어나 아빠에게 가장 솔직했던 날
처음으로 대학 때 친구에게 이혼 얘기를 꺼내며 의연함을 남김없이 소진해서였을까. 이튿날 아침 언니가 아기 조카를 보여 주겠다며 영상통화를 걸어오더니 애들을 어떻게 그렇게 잘 키웠냐 고생 많았겠다고 하는데 돌연 눈물이 흘렀다.
그날 아침도 어김없이 남편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
그리고 모처럼 네 식구 문화생활을 즐기러 나갔다가 물에 섞인 기름처럼 겉도는 남편을 집에 먼저 보낸 후에야 마침내 아이들과 남은 오후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참 얄궂지. 그렇게 내가 같이 나가자고 몇 년 동안 애원할 때는 안 듣더니 이제와 왜 그러는 걸까.
아이들이 공연을 보는 동안 단란한 부부와 연인들의 모습이 자꾸 눈에 들어와 내 처량함은 커져만 가는데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침에 내가 운 게 못내 마음에 걸려서 나 있는 데로 오겠다고, 와서 저녁을 사 주겠단다. 그리고 집에 먼저 들어갔던 남편은 처형 연락을 받고는 밥을 같이 먹겠다고 다시 나왔고.
그날 나는 언니에게 남편이 안 보는 틈을 타 그간의 사정을 알리며 진지하게 이혼 의사를 밝혔다. 아빠한테서 퇴근 직전 뜬금없이 안부 전화가 온 건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이었다. 언니가 아빠한테 내 얘기를 전했을 것 같진 않았지만, 언니와 동생에게 얘기를 꺼냈으니 아빠한테도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나 내 결혼생활을 이제 끝내고 싶어.
얼마나 오래인지도 모를 만큼 늘 혀 끝에 맴돌던 말을 마침내 아빠에게 하고 말았다.
"남편과의 관계를 내 인생에서 도려내야겠어요,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미안해.”
많이 힘들었냐고 아빠가 물으셨다.
“언니한테는 어제 얘기했어요. 그 전날에는 막내한테도 얘기했고요. 걔가 얘기를 듣더니 내가 속이 텅텅 빈 채로 사는 게 꼭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 인간 같다고, ‘도망쳐!’ 그러더라. 살려면 남편과의 관계를 끊어야 해요. 안 그러면 내가 죽을 거 같아서. 죽느니 그래도 이혼이 낫겠다 싶어서. 지금 내가 겪는 여러 불행이 다 그 사람이 내 남편인 것에서 왔어.”
언니처럼 아빠 역시 그간 내가 고생이 너무 많았다고 했다. 단지 반응에 차이가 있었다면 언니는 ‘그래, 제부가 정말 우리 아빠들 세대도 아닌데 너무 심했지,’라고 말했고, 아빠는 "니가 김 서방 때문에 고생한 얘기를 하면 나는 그게 다 너희들 엄마에 대한 내 허물이 자꾸 드러나는 거 같아서 미안하다"고 했다는 것.
일흔이 넘어 자기 연민에 빠지기 좋은 노인이 되셨다는 점은 잘 알지만, 그것은 아빠 몫의 반성이고 지금 당면한 내 문제에 대한 시의적절한 반응은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아빠, 내가 아직 사십도 안 됐잖아. 자기 과업 성취밖에는 모르는 사람 때문에 혼자 애들 키우면서 괴롭고 외로운 십 년이 지나갔어. 요즘 이런 백세시대에 내가 또 다른 암이 생기거나 사고로 돌연사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80살까지는 부부의 모습을 유지하고 살아야 하는데, 아빠, 지금 이 짓을 앞으로도 40년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 완전 돌아 버릴 것 같아. 나는 그렇게는 살 수 없어. 세상에는 내가 누릴 수 있는 크고 작은 행복이 너무 많잖아. 근데 저 사람이 내 남편인 이상 나는 결코 그 행복을 제대로 누릴 수 없어.
직장에서 너무 보람 있게 잘 지내다가도 집에 와서 남편을 보면 갑갑하고 온몸에서 행복이 다 빠져나가. 남편 얼굴을 보면 숨이 막혀. 하도 잠자는 걸 많이 봐서 남편 코 고는 소리가 내 발작 버튼이 되었어. 아빠, 나 농담하고 장난치는 거 너무 좋아하잖아. 거의 숨 쉬듯이 그러잖아. 근데 밖에서 그렇게 잘 웃고 지내는데 집에 들어오면 도무지 웃을 수가 없어. 내가 웃지를 않더라고. 퇴근하면 애들이 엄마 왔다고 반가워서 들러붙는데 눈에 남편이 들어오면 그 환영에 제대로 화답할 수가 없어. 농담이 나오지 않아, 집에 들어가는 순간 스위치가 꺼지는 거 같아.
아빠, 계속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앞으로도 40년을 더 시체처럼, 그냥 영혼을 어디다 빼놓은 채로 껍데기로만 불행하게 살아야 할까? 아빠, 나는 웃고 싶어. 웃고 행복하고 싶어.
이혼하면 나는 인생이 완성될 것 같아.
"아빠의 체면이나 명예를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지만, 나는 이혼을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은 니가 하지 마라. 체면이 어디 있노. 명예라 할 것도 없고. 니가 그렇게 괴로운데, 니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게 중요하지, 나는 아무 상관없다.”
“아빠, 이혼을 하더라도 아빠의 딸인 것은 바꿀 수 없겠지만, 남편의 아내인 것은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테니까. 아빠, 이혼이 내 좁은문이야. 나는 하루라도 더 일찍 이 생각을 못 한 것이 너무 억울하고 슬퍼. 이 부당함을 더 빨리 깨닫지 못한 멍청하고 순진했던 내가 너무 저주스러워.”
“하아….”
“아빠, 나는 사는 게 괴로웠던 동안 더 누리지 못하고 지나간 모든 행복이 너무 아까워. 나는 이걸 깨닫기까지 너무 큰 비극을 비용으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이제는 전과 같은 모양으로 살아갈 수 없어. 살기 싫지만, 살아서 행복하고 싶어.”
사람이 너무 힘들면 토하듯이 말을 하기도 한다. 내가 해 봐서 잘 안다. 아빠는 딸이 슬픔을 토하는 소리를 그저 듣고 있더니 가만히 물었다.
“그래…. 남편은 뭐라고 말하노. 니가 그렇게까지 힘든 걸 모르나.”
남편이 조금씩 변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남편도 스스로 자기가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고도 전했다. 물론 그의 요점은 자기가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왜 내가 변하지 않느냐는 거였지만.
어이가 없었다. 나는 내 말이라면 방화벽처럼 다 튕겨내는 사람이랑 사느라 참고 고생했는데, 자기는 내가 골병이 나고 자기 학업이 안 풀리니까 이제야 노력이라는 걸 해 본다고. 근데 그 노력이라는 게 애들 저녁밥 챙겨 먹이는 거다. 애들 숙제 챙기는 거다. 식기세척기를 돌리는 거다.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거다. 가정의 일원이라면 마땅히 같이 해야 하고, 아빠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그런 일 말이다.
“자기가 노력을 했대. 그걸 그렇게 생색을 내. 근데 우리가 외국 가서 첫 1년 동안 당일 여행을 3번인가 갔어. 그중에 한 번은 우리 식구들 왔을 때 당일치기 간 거, 또 한 번은 자기 친구가 근처 도시로 와서 만나러 간 거. 그러니까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말 여가처럼 보낸 거는 딱 하루 같이 당일로 나들이를 간 게 전부야. 그것도 반나절을. 근데 그게 자기는 여행이래. 여행을 분명히 다녀왔는데 왜 안 갔다고 하냐고 나더러 이상한 사람이래.
방학이 여름 두 달 꼬박인데 단 하루를 놀러를 못 갔어. 그 당일 여행이라는 것조차도 단 하루를 못 갔어. 공부하느라고. 과제하느라고. 나는 그러는 동안 애들 둘을 혼자 봤어. 남편보다 내가 언어가 잘 되고 시간도 있으니까 외국어로 된 각종 행정처리며, 애들 학교 서류, 준비물 챙기면서, 집주인이랑 의사소통하는 것도 내가 메일 다 쓰면서, 그 부담을 다 안고 살았어. 외국 사는 내내 그랬어. 아빠, 나는 내가 영어를 잘하고, 언어를 잘 배우는 게 남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았어. 그런데 봉사와 기다림이 기약도 없이 이어지니까 이제 너무 지치고 답답해.”
“그래…. 니가 고생이 많은 줄은 식구들이 알고 있지.”
학바라지는 하는 사람들이라면 으레 겪을 법한 그런 정도의 고생이라고 아빠도 생각할 거다. 그 정도였으면 나도 참았을 거다. 지난 몇 년을 거뜬히 보냈을 거고, 십 년이 부족하여 남은 학바라지가 있다면 앞으로도 몇 년은 더 할 수도 있었을 거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