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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Dec 14. 2022

슬기로운 의사생활 교수님을 만나다

9. 끝나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해요.

다음에 6개월 뒤에 오면 된단다.


“다행이네요. 재발은 어떻게 보세요?”

“일단 괜찮을 것 같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선생님, 스트레스를 정말 정말 많이 받아도, 그래도 괜찮을까요?”


나는 지금 몹시 진지하다는 눈빛 때문인지, 조금은 건조하게 말씀하시던 교수님의 말투가 달라졌다.
이 환자 왜 이러나 싶으셨나.  


“스트레스는 안 받아야죠.”


그래, 나도 안다. 모진 스트레스를 받고 싶어서 받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여름 내내 스트레스를 진짜 너무너무 많이 받아서 혹시 재발했으면 어쩌나 했어요. 이거 생긴 거 알았을 때도 워낙 오래 힘든 뒤였어서.”

“뭐-가 그렇게 힘드셨어요?”


되게 단순한 질문인데, 선생님은 ‘환자분, 말하지 않으면 내보내지 않겠어요,’ 하는 눈빛을 보내시고 옆에 있던 레지던트 같은 선생님도 뭔데, 말해 봐요, 하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홀리기라도 한 듯 또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이혼-이 너무 하고 싶어서요…….”


말을 뱉으면서도 뭐 이런 미친 여자가 다 있나 싶으시겠다는 생각이 들어 혹시라도 그런 눈으로 나를 보시면 기꺼이 감내하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선생님이 고개를 의미심장하게 끄덕이셨다.  


“그때가 제일 힘들 때예요.”


?? 뭐라구요?


“그때가 제일 힘들어요. 저도 알아요.”



상급종합병원의 작고 소중한 좋은 점은 희귀병이나 난치병을 덜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크게 아픈 사람들이 다 큰 병원으로 몰리니까. 같은 맥락에서 나쁜 점이라면 나한테는 심각한 일이 교수님한테는 아주 흔한 일이기에 환자와 병을 무덤덤하게 대하는 태도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점이고.


지난 일 년 동안 계속 그랬다. 늘 오전 첫 타임에 진료받으면서 어떤 식으로든 사무적이지 않은 진료를 기대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갑자기 이혼 같은 게 너무 하고 싶다는 내 뜬금없는 말에 공감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선생님 말을 금방 이해할 수 없어 눈썹만 자꾸 올라가는 게 당연했다.


지나가면, 끝나고 나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저도 아파 봤어요.

??? 무슨 뜻이지? 어디가 아프셨다는 거지?


내 나라 땅에서 내 나라 말로 진료받는데 깔끔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다니. 외국에서 진료받을 때도 한 번도 없던 일이라 나도 모르게 앵무새처럼 고개를 갸웃거렸고, 눈으로 말하기를 이어가던 선생님은 내가 여전히 못 알아듣고서 고개만 옆으로 재차 기울이자 마침내 새에게 말을 걸듯 눈을 정확히 맞추며 다시 말씀하셨다.


저도 겪었어요. 저는 3년 정도 됐어요. 2년 반 정도 걸렸는데, 그때 안 아픈 데가 없었어요. 그런데, 끝나면 그게 다 없어져요. 정말 다 사라져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끝나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아니 이건 자기도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정도의 고백이 아니지 않은가. 뜻밖의 말에 같이 있던 남자 선생님 눈치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나도 말했다.


“선생님, 너무 힘든 게 이어지던 중에 갑자기 없던 알레르기가 생기고, 그러다 생리주기가 3주로 짧아진 게 벌써 2년도 더 전이에요. 그리고서 종양이 생긴 것도 알았고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이렇게 힘들다가 또 뭐가 고장 나면 어쩌나 싶은 거예요.”

“잘 버티셔야 해요. 끝나면 좋아질 거예요.”


이런. 선생님이 힘내라는 눈빛으로 손을 꼬옥 잡아줄 수 있는 의사 선생님이었다니.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참느라고 잠시 조용히 있다가 입을 뗐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결과가 깨끗하다는 말보다 지금 해 주신 말씀이 더 감동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음 말을 할까 말까 살짝 고민하는데 선생님이 또 말을 하라는 눈빛을 보내셨다.


“혹시나요, 혹시나 해서요. 김사부 선생님께는, 오프 더 레코드로 해 주세요.”

“아, 김사부 교수님이요. 아시는구나.”

“네, 결과지 찍어 보내서 상담하고 한국 오면 말하라셔서 연락드렸더니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는데. 근데 이 일은 제가 김사부 교수님께 언젠가 따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까먹기 전에 발뒤꿈치 다친 거에 바를 거 있을까 싶어 얘기했더니 선생님이 의료용 테이프를 잘라 붙여 주시고는 쓰시던 걸 가져가라고 주셨다. 새로 하나 처방도 해 주시고. (개이득.)


진료실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다 대고 선생님이 외치셨다.


“돌아가서 좀 주무세요~!”

“아. 먹고사니즘 때문에 출근해야 하지만 감사합니다.”


아늑하려야 아늑할 수 없는 대학병원 진료실을 따뜻한 자매애가 가득 채우는 순간이었다.   




 

끝나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진료보다 더 소중한 위로를 받은 그날 이후 시간은 흘렀고, 나는 친구들에게 이밍아웃을 했다. 다른 상급병원 암센터에서 일하는 친구가 내 얘기를 듣더니 내가 정말 좋은 교수님을 만났다고 좋아해 주면서 한편으로는 많이 신기해했다. 환자 한 명을 2분, 3분 컷 하기 바쁜 종합병원에서 그렇게 개인적인 얘기를 오픈하면서까지 환자에게 공감해 주는 의사는 드물다고 말이다.


그러게 말이다. 그래서 교수님 말씀을 한 번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 좀처럼 진료실에서 들을 법하지 않은 말이었으니까.


친구를 만난 다음날 나는 교수님께 <끝나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제목으로 썼던 위의 글과 함께 언저리 사연을 담은 글 몇 편을 메일로 보냈고,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답장을 받았다.


읽고서 눈물 펑펑 쏟은 뒤 다시 보낸 메일에 교수님은 훨씬 더 긴 답장을 보내셨고, 나는 교수님 때문에 눈물 마를 날이 없다며 또 왈칵 눈물을 쏟았다.


교수님한테서 진료 시간이 더 길었으면 좋았겠다고, 다음번에는 커피 마시자는 말까지 들은 일도 언젠가 쓸 기회가 있을까. 없을 것 같다. 굳이 그것이 아니라도 나는 할 말이 많은 여자니까.


맞춤법 검사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글이 제 마음을 담고 있어 부족한 감사 인사를 이것으로 전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읽은 친구 중 하나가 ㅇㅇ병원 암센터에서 일하는데 선생님이 아주 좋은 분이시라고, 제가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고 특히 좋아해 줬어요. 2분, 3분컷 하기 바쁜 대학병원에서 개인사까지 꺼내어 환자를 위로해 주는 선생님 만나기 힘들다고요. (그날 아침 옆에 있던 남자 선생님 눈치가 보일 지경이라 더 감사했어요.) 그날 만큼은 제 진료 시간이 슬의생 같은 순간이었어요.

모쪼록 건강하시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뜻깊은 시간들 누리실 수 있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실제로 손을 잡아주지는 않으셨지만, 그날 진료실에서, 그리고 메일 속에서 교수님은 내 손을 꽉 잡아준 것과 다름없었다. 누가 슬의생은 드라마일 뿐이라고 했는가. 내 슬의생 교수님의 메일을 옮겨 본다. 혹시 나 말고도 눈물 펑펑 쏟으며 위로를 얻을 사람이 있을까 하여.


안녕하세요!
저 단숨에 글을 읽고 제가 감동을 받았네요.
너무 신기한 게 마스크를 쓰는 코로나 시대에 얼굴 표정을 보지 않아도, 그 사이로 나오는 눈빛만으로도 환자분들의 감정이 저한테는 보이더라구요.
특히나 제가 공감할 수 있는 눈빛들이 있어요.

오신 그날도 도비 씨의 눈빛을 보고 이게 단순하게 수술부위 때문에 온 것만은 아니라고 느꼈던 것 같아요.

너무 더 훌륭하게 글을 써주신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지금 아픈 것… 다 이유가 있을 것이에요. 새롭게 태어나라고 한번 내 몸을 더 잘 돌보고 힘내서 다시 출발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참 쉬운 말...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이게 틀린 말은 아니더라구요.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아파만 하고 지낼 것인지 나를 위해서 다독이며 다지는 기간을 지낼 것인지 생각해보면 후자가 맞거든요 (이성적으로는요..ㅎㅎ ) 알지만 힘들 때는 힘들다고 하고 누워 있기도 하고 그러면 돼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 도움도 받으시고…

글을 읽으면서 도비 씨의  resilience (회복력)이 보였어요.
힘내세요…
그리고 너무 글을 잘 쓰셔서 책으로 내도 될 것 같습니다.

슬의생 드림

PS> 월요일에 받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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