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슬픔을 알아주는 사랑
남편의 아내로 살아가는 삶이 힘들었다고 내가 말하면 아빠는 아빠 세대의 남편상과 아버지상에 맞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내 남편에 투사하며 슬퍼할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솔직히 말해야만 했다. 사위의 태도가 어땠는지, 내가 얼마나 갑갑하고 쓸쓸했는지.
“아빠, 그냥 고생이 아니야. 월요일까지 과제 마감이라고 해 놓고 월요일만 기다리면서 한두 주를 밥 한 끼 같이 못 먹고, 아침마다 남편 두 끼 먹을 샌드위치랑 커피랑 만들어서 보내면, 애 도시락 싸서 학교 챙겨 보내고, 준비물, 생필품 내가 다 챙기고, 걸음마 겨우 하는 둘째 데리고 종일 독박 육아와 살림을 이어가면, 밤에 들어와서 고생했다 한마디 하고 남편은 방에 가서 자기 공부를 해.
남편은 조급해지면 발소리부터 달라져. 그럼 그 긴장을 나는 남편이 집에 있는 짧은 시간 동안 고스란히 느끼면서 배려를 하면서 살아. 그렇게 오매불망 과제 끝날 날을 기다리면서, 과제가 끝나면 조금 숨 돌릴 틈이 생길까, 쉼 같은 쉼을 내 마음이 누릴 수 있을까 하면서 월요일을 기다려.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참아. 그런데 남편이 월요일에 와서 그래, 마무리가 덜 되어서 조금 더 해야겠다고. 아빠, 그럼 나는 하늘이 무너져. 그런데 모든 과목, 모든 시험, 모든 과제를 매일 그렇게 했어. 1학기도, 2학기도, 3학기도, 그다음도 나는 몇 년을 고3 엄마처럼 지냈어.”
“남들은 주말마다 가족끼리 공원 가고 옆 도시로 놀러 가는데 나는 귀국이 결정되기 전까지 그걸 한 번을 못 했어. 그런데 내가 그런 얘기를 하면 남편은 뭐라는 줄 알아? 왜 남들이랑 비교를 하녜. 다른 사람들은 학생 가족이건 직장인 가족이건 주말에는 같이 여행도 가고 서로 초대해서 같이 밥도 먹고 친해진다고 하면, 남들 하는 거 어떻게 다 하고 사냐고 그랬어, 나한테."
"힘들다고 하면 어쩌라는 거냐고, 더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불평하냐고 그랬어. 애들 데리고 살 집도 있고 차도 있는데, 더 고생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감사한 줄 알아야 한다고 불평하지 말라고 했어. 나는 기본적인 욕망도 다 거세당한 채로 학대받는 것처럼 힘들게 살았어. 가까운 이웃들한테도 말 못 하고, 교회 가도 말 못 하고 그냥 그렇게 살았어.”
“우리한테라도 얘기를 일찍 했으면 좋을 텐데, 우리가 너무 미안하다.”
아빠가 나한테 미안해하는 게 싫었다.
“무슨 좋은 소리라고 해, 그걸. 그냥 참고 살았어요. 아, 내가 불평 많은 여자구나. 내가 요구 많은 여자구나. 내가 그릇이 작은 사람이구나. 사는 게 힘들 때마다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 못난 사람이 되어야 했어. 아빠, 이게 가스라이팅이야. 나는 남편과 같이 살면 앞으로도 그런 사람으로 살아야 해. 자기가 논문을 못 쓴 게 나 때문이래, 내가 불행해 보였고 내가 힘들어했기 때문에 자기는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대, 그래서 논문을 못 쓴 거래. 그게 내 탓이래, 자기가 성과를 내지 못한 게.
근데 아빠, 나는 그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잖아. 나는 보통은 어디서나 예쁨 받잖아. 환영받잖아. 근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주 뒤틀리고 못난 사람이 되어 있었어.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까맣게 잊고 살았어."
"한국에 와서 이혼하기로 했어. 그러다가 어머님이랑 일 터지고 시체처럼 사느라, 이사할 집 구하고 어쩌다가 이혼을 못 하다가 출근을 시작했어. 여름에 논문 마무리 못 하면 이혼하기로 했었어. 근데 남편이 봄에 한 달 넘게 누워서 지냈어. 논문을 안 쓰고 누워서만 지내서 내가 아버님한테 전화해서 남편 좀 어떻게 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어.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남편 그런 거 보면서 정말 너무 괴로웠어. 근데 겨우 겨우 달래서 왜 그러냐 물었더니, 나 때문이래. 자기가 노력을 했는데 내가 변하지 않으니까,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니까 이제 어떡해야 하나 하고 뻗은 거래. 공부를 내려놓아야 하나 싶어서 드러누웠대. 공부를 내려놓아야 하나 싶어서.”
“아빠,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남편은 내가 힘들다고 산책 좀 같이 갈 수 있냐고 할 때는 아내가 슬프다는 사실로 좌절한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그런데 공부를 내려놓아야 할까 싶으니까 드러누운 거야. 자기 공부가 소중하니까."
"나는 이미 마음이 떠났어. 같이 셀카를 찍을 수 없는 사이가 된 지도 이미 오래되었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제발 커피 한 잔이라도 같이 오붓하게 마시면서 애들 얘기도 하자고 울면서 구걸하듯 말했었어. 그게 벌써 2년도 더 전이야. 근데 남편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자기는 그걸 하면 앞으로 일절 집안일을 하지 않을 거래. 저녁을 집에서 먹으면 가끔 설거지하던 거, 어쩌다 가끔 쓰레기 내다 버리던 거, 그런 거마저 일절 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도 괜찮으면 그걸 조건으로 자기는 나랑 일주일에 한 번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아이들과 놀이터로 30분 다녀올 수 있대. 그 말을 듣는데 내가 억장이 무너져서 커피고 나발이고 그냥 다 안 마시고 싶어졌어."
더 떨어질 정이 남아있었는지 기분이 새삼 나빴었다. 나는 그래도 거지처럼 알겠다고 한 것, 이제 아무 기여 안 해도 되니까 네 식구 함께 노는 시간을 가져 보자고, 구치하게 시간을 얻어낸 것, 그랬는데 막상 남편이 놀이터 가자고 하니 발이 안 떨어지더라는 것까지도 아빠에게 말했다.
"내가 거지처럼 얻어낸 시간이잖아. 근데 남편이 놀이터 가자고 하는데 그냥 너무 가기 싫었어. 애들한테는 놀이터에 다녀오자 하고 짐을 챙겼지만 나는 같이 안 가고 싶었어. 시야에 남편이 들어오는 거 자체가 싫었어. 그래도 애들한테 엄마 아빠 다 같이 노는 시간 갖게 해 주고 싶어서 꾸역꾸역 다녀왔더니, 자기가 어렵게 시간 내서 놀이터에 다녀와 줘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짜증을 냈어. 자기가 노력해도 내가 알아주지 않으니까 자기는 이제 노력하지 않겠대. 그리고 그 원인이 나야. 자기가 노력했는데 내가 좋아하지 않았다고 두고두고 내 탓을 했어."
"아빠.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답답하고 힘든지도 여태 모르고 살았어. 노력하면, 참으면 그래도 괜찮아질 수도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너무 오래 피폭을 입었고, 이미 진작 돌아올 수 없게 된 거야.
내가 좋기만 한 사람은 아니지. 나쁜 면이 있지만, 그게 내 전부는 아니잖아. 그런데 남편이랑 있으면 나는 나쁘기만 한 거 같애, 나는 그런 사람으로 더는 살고 싶지 않아. 나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란 말이야.”
울면서 묵은 설움을 와르르 쏟아내는 딸의 얘기를 아빠는 가만히 들어주었다. 딸은 아빠에게 미안했지만, 이미 쏟아지기 시작한 것을 쉽게 멈출 수는 없었다. 이혼 얘기를 언제 꺼내는 게 좋겠냐고 물었더니 아빠가 요즘 세상은 워낙 무서운 세상이라며 걱정했다. 이혼이 흔한 말세라고 걱정하는 줄 알았다.
“아빠,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철학도 남편보다 나한테 더 해롭지는 않아. 남편보다 더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상 따위는 없어. 그러니 나는 기필코 이혼을 할 거야.”
성급하게 버럭했던 그때, 아빠의 염려 가득한 말이 내 남은 대답을 다 뺏어갔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워낙 세상이 흉흉하고 뉴스에 무서운 소식들이 많이 나오니까, 나는 니한테 큰일이라도 날까 봐, 니가 혹시라도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그랬지.”
아빠에게 그가 적어도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다. 혹시라도 내가 다치게 된다면 이혼 요구에 조금 더 정당성을 보태는 사건이 생긴 셈이니 나는 조금 다친 것이 오히려 기쁠 거라고 말이다. 그러자 아빠는 작은 부상으로 그치지 않게 될까 걱정했고, 나를 아주 잃게 될까 걱정했다. 할머니를 먼저 보내고 나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잘못한 것만 자꾸 생각나서 많이 힘들더라고. 그러니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떠나는 일 같은 건 생각도 하기가 싫다고, 아빠에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아빠는 체면 따위 생각 않고 자신이 딸의 슬픔을 다 헤아리지 못하는 아빠였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했다. 딸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봐 슬퍼했다. 그리고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나는 또 슬퍼졌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건 그런 거였다.
그런데 남편은 나에게 왜 그랬을까. 왜 나의 아픔에 슬퍼해 주지 않고 늘 한숨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봤을까. 늘 그렇게 지친 얼굴로. 늘 그렇게 자기 코가 석 자, 넉 자인 채로. 늘 그렇게 발등에 꺼지지 않는 커다란 불이 붙은 채로. 자기 삶 하나 감당하지를 못해 그렇게 나까지 힘들어야 했나. 하루 이틀도 아닌 삶을 나는 그렇게 내 자신을 뜯어먹으며 한 해 두 해, 아이들을 키우며 버티며 살아왔구나.
아빠는 물었다,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아빠는 속사정을 모르고 살았을까 하고. 아빠가 슬퍼할까 봐 말을 못 했지. 그리고 차마 하지 못했던 말.
엄마한테 말하면, 엄마는 나보고 잘하라고 했다고. 남편이 나에게 여유를 내주지 않는다고 일렀으면 과연 엄마는 그놈 참 이상하다고 헤어지라고 말했을까. 반찬이라도 하나 더 잘 챙겨주라고 말했겠지. 사위한테 그만 지랄하고 남편 노릇 똑바로 하라고 삿대질할 사람은 아니니까. 엄마는 그런 엄마니까. 자기가 살아온 고생스러운 삶으로 나를 할 말 없게 하니까.
폭포처럼 쏟아지는 얘기를 듣더니 아빠는 상담 같은 걸 받아 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부부 상담인지 우울 상담인지는 모르겠지만 봇물 터지듯 속상함이 차오른 나는 또 제대로 듣지 않고 대답했다.
“상담을 받아서 뭐하게요, 그 사람을 더 이해하게요? 아빠, 암이랑 알레르기가 같이 있으면 뭘 먼저 치료해야 해요? 암부터 도려내는 게 먼저잖아요. 암부터 도려내고 알레르기를 치료하든 해야죠. 알레르기가 나아도 그게 무슨 소용이야, 암환자인 게 더 큰 일인데. 아빠, 나는 암부터 도려내고 싶어요. 우선 암부터 도려내고 만성피로든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게 맞잖아요. 그러니 나는 남편부터 내 인생에서 빨리 도려내고 싶어요.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빠와 통화를 하고 약 3개월 뒤 나는 법원에 가서 서류를 제출했다. 물론 그 사이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