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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Dec 22. 2022

내 헤드폰이 그렇게 나쁩니까

10. 사랑을 잃고, 헤드폰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했을 때 남편은 입시 준비로 바빴고, 나는 여가 시간이 없었다. 첫째가 생후 6개월이 되었을 때 남편이 대학원 입학과 더불어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며 나는 친정에서 살게 되었다. 아이가 조금 큰 후 일을 하면서 번듯한 용돈도 아닌 사례를 어쩌다 드리게 되면 엄마는 그 돈을 또 받지 않으셨다. 나는 친정 생활이 많이 죄송했다.


중학생 때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면 언제나 산책을 했던 나는 아기띠를 하고 유모차를 밀고 장을 보러 나갔다. 잠이 들지 않은 아이와 상호작용을 해야 했지만, 그게 내 산책을 대신했다.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아이의 부름에 대답을 하고 아이가 자라 차츰 대화를 나누는 동안 혼자만의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사고처럼 둘째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돌을 넘겼을 무렵 외국으로 갔다. 귀여운 아이들은 자라서 테레비를 보고 말을 하고 떠들고 싸웠다.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칼질을 하고 반찬을 볶고 국을 끓였다. 뉴스 한 꼭지, 드라마 한 편도 소음 방해 없이 듣기가 힘들었다.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그렇게 둘째가 어렸을 때 구매한 그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유모차에 태울 때마다 아이가 엄마, 엄마, 말을 건 탓에 아이가 한국어를 어느 정도 깨칠 때까지 밖에서는 제대로 쓴 적도 없었던 내 헤드폰. 도서관이 문을 닫으면 집에 돌아와 밤새 공부하곤 하던 남편을 두고 나는 조용히 헤드폰을 쓴 채 거실의 장난감을 정리했고, 헤드폰으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내 헤드폰은 삶이 힘들어질수록 더 소중했던 내 링거이자 나의 도피처였다.




내가 알아온 모든 순간 학생이었던 남편은, 학생이라는 신분을 이유로 몇 년 간 커피 한 잔어치의 담소조차도, 아이들과의 공원 나들이조차도 재차 거절했던 남편은, 내가 버티다 버티다 속이 텅 비어버리고 고장이 나자 외양간을 고치겠다며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양간을 고치려는 그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소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급기야는 공부를 하지 않고 드러누웠다.

 

본인이 논문에 집중을 못한 것도 내 탓, 그러니 논문을 제때 못 마친 것도 내 탓, 드러누운 것도 결국 내 탓. 모든 게 아내 탓이라는 피해호소인의 말에 가해자가 된 내 화병 역시 극에 달하고 말았다. 아직도 더 떨어질 정이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절망의 크기를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코스피나 나스닥에도 바닥 밑에 또 지하가 있다고들 하는데, 감히 말하고 싶다. 주가에는 반등의 희망이라도 있다고.


이혼 욕구가 곧 터질 것 같은 휴화산 아래의 용암처럼 출렁였다. 숨 쉬기가 점점 더 답답해졌고, 옅어지는 어둠을 보며 선잠을 잤다. 그런 괴로움 속에서 이혼을 고민하면서도 삶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갔던 비결은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아이들의 일과를 어느 정도 끝난 후 나간 산책이었고, 혼자 나가는 산책길은 언제나 헤드폰이 동행해 주었다.


외국에서까지 이어진 내 지난한 학바라지의 동반자, 보스의 노이즈캔슬링 헤드폰. 그런 소중한 헤드폰을 쓰고서 이 내 가슴에 창을 내고자 산책한 후 돌아올 때, 노래 한 곡이 안 끝났으면 나는 집에 와서도 노래를 마저 들은 후 헤드폰을 벗곤 했다. 어차피 아이들은 모두 잠들었고, 남편과는 나눌 얘기가 없었으니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예의를 논하기 전까진 말이다.




산책을 마친 후 캄캄한 집에 들어와 땀을 식히고 물도 마시며 한숨 돌리는 중이었다. 방에서 남편이 나오더니 뭐라고 언짢은 듯 말하는 게 보여 헤드폰을 벗고서 왜냐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는 돌연 화를 냈다.


"됐어요. 말 안 할래요.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헤드폰을 좀 벗어요. 저번에도 그러더니 좀 전에도 내가 여보 들어오는 소리가 나서 한참 말을 했는데 여보가 대답을 안 하잖아요. 들어오면 들어왔다고 말도 안 하고, 말을 해도 대답이 없어서 보면 집안에서 헤드폰을 쓰고 있고. 너무 예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예의가 없다고요? 내가요?


"여보가 말하는 줄 몰랐어요. 그리고 집에 들어올 때 소리가 나니까 따로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고요. 여보도 어차피 여보 방에서 뭐 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팟캐스트나 노래 듣던 게 내가 집에 들어오는 시간에 딱 맞춰서 끝나는 일은 잘 없어요. 그러면 보통 나는 듣던 걸 마저 듣고 그게 끝나면 헤드폰을 벗고요. 다른 뜻은 없어요. 애들 관련된 거 아니면 나눌 얘기도 잘 없으니까."

"앞으로는 집에 들어오면 헤드폰을 벗도록 해요. 같이 사는 사람에 대한 예의는 있어야지요."


나는 그때만 해도 그놈의 예의 소리가 이렇게까지 듣기 싫어질 줄은 몰랐다.




*이 글은 보스 헤드폰 광고가 아닙니다. 

제 보스 헤드폰은 오래된 모델인데도 불구하고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제법 괜찮습니다. 덕분에 남편에게서 예의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말았으니까요. 그것도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말이죠. 보스 헤드폰은 무엇보다도 이어패드가 아주 폭신해서 몇 시간을 쓰고 있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저는 귀도리 스타일로 젠하이저, 소니, 플랜트로닉스, 오디오테크니카의 헤드폰을 사용해 봤는데 보스가 착용감이 제일 좋았어요. 


인간 세상에 때때로 환멸을 느껴 우주의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픈 분들이 있다면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추천합니다. 나를 둘러싼 번잡한 세상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싶으신 분들에게도 노캔 헤드폰을 추천합니다.

물건 잘 못 챙기시는 분들, 자꾸만 어디다가 이어폰을 한 짝씩 흘리고 다니는 분들, 방바닥에 구멍이라도 뚫린 건지 귀걸이도 양말도 자꾸만 한쪽씩 사라져서 고통받는 영혼이 있다면 자신 있게 추천합니다.


이어폰이 오토바이라면 헤드폰은 자동차입니다. 이어폰이 캔커피라면 헤드폰은 싱글오리진 핸드드립커피입니다. 이어폰이 냉동 동그랑땡이라면 헤드폰은 한우 오마카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사세요.


도비는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이 있어서 암을 이겨냈고, 노이즈캔슬링 헤드폰 덕분에 이혼 시기도 잘 버텼으니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광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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