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발칙한 이혼 일지>를 상사에게 내밀었다.
나는 빠르면 내일이나 모레라도 옮길 예정이에요.
애들 따로 인사 안 해도 괜찮아요.
아이들과 호텔에 도착해서 막 체크인 했는데 남편이 갑자기 이사를 나가겠다고 카톡을 보내왔다.
?? 당장 월요일부터 어쩌라는 거지?
필요해서 하는 사직서 제출과 이사 통보도 한 달은 말미를 주는데, 당장 급하지도 않은 주거 분리를 무려 하루이틀 전에 알려온 남편. 그것도 주말에.
이혼이 완료되기 전에 나갈 수도 있다고 의사를 표명하긴 했었지만, 우리는 애가 둘이나 있으니 태권도 학원에 등록할 시간 정도는 필요하지 않은가. 난처했다. 당장 하루 정도는 동생에게 부탁할 수도 있지만, 화요일부터는 꼼짝없이 9살 첫째가 6살 둘째를 하원시키게 생겼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밖에서 놀고 돌아왔더니 아빠는 짐 챙겨서 집을 나가고 없고, 거기에다 동생 어린이집 픽업까지 맡게 되면 첫째는 마음이 얼마나 암담할까.
계속 볼 거니까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나겠다는 남편에게는 그래도 아이들도 입장이 있으니 인사는 나누고 떠나라고 말했고, 예약된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어느새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왔다.
일요일 오후, 내가 부탁한 대로 더 날이 추워지기 전에 시댁에 있던 아이들 겨울 옷가지를 가져오겠다던 남편은 어머님이 바리바리 챙겨 주셨는지 첫째가 아기 때 쓰던 손목 딸랑이까지 거실에다 덤핑한 뒤 새로 뽑은 차를 타고 떠났고, 봇짐투성이로 어수선한 거실에 마음까지 어지러워 우선 눈앞에 놓인 짐 정리부터 시작했다.
뭐 이런 것까지 다 챙겨 보냈나 싶어 뚜껑이 열리는 걸 참아가며 정리를 하고 또 했지만 거실은 통 깨끗해지질 않았다. 짐도 짐이지만 아이들도 큰일이었다. 당장 둘째를 하원시킬 사람이 없었다. 어린이집에 혼자 늦게까지 남아있어도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다른 아이들이 하나둘 집에 갈 때도 몇 시인지, 엄마아빠는 언제 데리러 오는지 묻지도 않고 집중해서 노는 아이라고 선생님이 늘 칭찬하셨던 우리 둘째가 마음에 걸렸다.
이미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하원하던 둘째를, 갑자기 아빠 자리가 비어버린 아이를 저녁 늦게까지 텅 빈 어린이집에 혼자 두려니 영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태권도 학원에 등록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칼퇴를 사수해야만 했다. 이미 칼퇴 요정이었지만, 약간의 배려가 더 필요했다. 나는 일을 잘하고, 누구도 피해 입지 않게 할 수 있으니, 당장 애들이 딱하게 되었으니 엄마로서도 쫄보가 되지는 않아야 했다. 절박한 누군가에게는 고민의 여지조차 굉장한 사치니까.
칼퇴 요청을 이따위로 하는 사람도 있을까. 내가 내 직장 상사였다면 그날 나는 이런 제목으로 글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이혼한다고 일기장을 내밀며 칼퇴시켜 달라는 직원, 이대로 괜찮은가요?
싱글맘이 무슨 벼슬이라서, 이혼이 무슨 자랑이라서 글을 쓴 게 아니었다. 단지 조금만 알아줬으면 했다. 그동안 이런 힘든 사정이 있었다고, 외국에서 암 수술도 하고 왔었다고, 한국에 온 지 한 달 만에 취직하면서, 어머님이 칼을 던지고 남편은 숨통을 조여오며 나를 힘들게 했던 지나온 그 시간 동안 아픈 내색 한 번 없이, 스윗하고 성실하게 일한 나는 대단한 사람이지 않냐고, 그러니 당분간만, 부디 아이들 다닐 태권도 알아보고 등록할 며칠 정도라도 칼퇴근을 하게 해 주십사 하고 말이다.
사실 칼퇴도 아니라 한 시간 조기 퇴근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상황이었다. 구구절절 알리지 않아도 받을 수 있는 배려였지만, 이미 법원에 서류도 제출한 마당에 굳이 더 숨기지 말자는 생각도 있었다. 아무리 대비해도 육아는 변수의 연속이니까.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중요한 얘기라서 잘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제가 사실 이혼을 하고 있어요. 서류 제출도 마쳤는데 남편이 갑자기 어제 짐을 챙겨서 주거 분리를 하는 바람에 당장 오늘부터 혼자 아이들을 돌보게 되어서요."
"어머, 애들은 어떻게 해요, 그럼?"
"그래서 부탁을 드리려고요. 아이들이 태권도 하나씩만 더 다니면 제 퇴근시간이랑 맞출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태권도 등록을 해야 하는데, 그전까지 한 며칠만 일찍 퇴근할 수 있을까 하고요."
된다고, 얼마든지 그러라고, 이건 뭐냐며 나중에 읽어 보면 되냐시는데,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얼굴을 보자 갑자기 그렁그렁 실시간으로 차오르는 눈물이 내 시야를 가리더니 그만 밖으로도 주룩 흐르고 말았다. 제법 많이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꽤나 민망했다. 눈물은 왜 흘려도 흘려도 자꾸 나오는 걸까. 차라리 동해물이 마르는 게 빠를 것 같았다.
급히 뽑아 건넨 휴지를 손에 쥐고 잠시 더 얘기를 나누다 조용히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시간을 벌었다.
다행히 그날 오후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9살 조카가 6살 동생 하원 시키게 된 사정을 들은 언니가 돌쟁이 아기를 데리고 급히 출동해 준 덕분에 첫째는 둘째 하원 책임을 맡지 않을 수 있었고, 나는 언니가 우리집에 머무는 동안 첫째 친구들이 많이 다닌다는 태권도 등록에 성공했다. 과정이 아주 순조롭진 않았지만, 아이들은 집 밖에서 늦게까지 머무는 일에 적응하는 중이지만, 나는 싱글맘으로서의 첫걸음을 그렇게 무사히 떼었다. (하지만 아직도 갈길이 구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