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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Dec 11. 2022

마침내 위대한 K-보육기관에 입성

나는 싱글맘으로 홀로서기를, 아이들은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엄마, 태권도 다니면서부터는 항상 이런 것만 먹는 것 같애!"


아홉 살 공주가 저녁 먹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이런 거? 지금 내가 파스타 병 소스를 부어서 밥을 줬다고 그러는 건가?
일부러 밤에 미리 삼색 파스타 삶아 놓고 브로콜리도 데쳐놓고 잤는데?


"공주야, 이런 거가 무슨 뜻이야? 이거 맛있고 몸에도 좋은 건데? 엄마가 일부러 단백질 많이 먹으라고 브로콜리랑 닭가슴살도 많이 넣었어!"

"아니이, 태권도 다니면서부터 계속 이런 거 먹는 거 같다고, 외식하는 거처럼 말이야."


엄마가 제 발 저렸다. 파스타 병 소스 털어서 대충 밥을 먹였다고 애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았다.


"외식? 엊그제 편의점에서 컵라면도 너네가 갑자기 먹어 보고 싶다고 먹고 싶다고 해서 먹은 거고, 지난주에 버거킹은 원래 한 번씩 갔었는데. 태권도 다닌다고 뭐 특별하게 달라진 거 없는 것 같은데?"


놀라서 우리는 딱히 변한 게 없다고 구차하게 변명을 해 버렸다.

태권도 다니면서부터라니.

태권도 다니면서부터 = 아빠가 집을 나간 이후부터 아닌가. 또르르…….


우리 아홉 살 공주는 말을 참 처연하도록 예쁘게 할 때가 있다. 엄마도 우리 꼬마들이 "태권도에 다니면서부터"서야 우리 공주가 말을 예쁘게 할 줄 아는 아이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태권도란 무엇인가.

낮에도 밤에도 동네를 누비며 다니는 그 노란 승합차에는 누가 타고 있는 걸까. 외국 살다가 한국에 왔더니 그 노란 승합차가 참 신기했다. 외국 살이 중에도 태권도는 있었지만, 노란 태권도 승합차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태권도가 없었다면 이 땅의 부모는 어떻게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K-보육기관은 실로 위대하다.


애들 아빠가 갑작스레 짐을 싸서 떠났고, 직장에는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양해를 구한 뒤 칼퇴를 보장 받았지만 그래도 보육에 빈자리가 생겨서 애들 둘을 나란히 태권도에 보내게 되었다.


출근 전에 반찬이나 국을 해 놓는 건 남편이 떠나기 전과 크게 다름없다. 남편 떠나고는 오히려 기운이 나서 애들 잠들면 청소도 하고 밥도 하고 글도 쓰고 더 열심히 산다. 나처럼 잔뜩 예민해진 남편과 일련의 일을 진행하면서 내 안에 남아있던 죄책감도 조금 옅어졌고, 싱글맘의 생활도 썩 나쁘지 않다고, 괜히 고민하고 미뤘다는 생각마저 들던 차였는데 불시에 딸이 “태권도 다니면서부터” 라고 말하니 엄마는 돌연 서글퍼졌다.


사실은 우리 애도 다 알고 있었던 거다. "태권도 다니면서부터" 엄마가 맛있는 걸 더 많이 챙겨 준다는 사실을, 몸에 안 좋다며 잘 안 사주던 음식도 그냥 사 줬다는 사실을.




괜찮다. 괜찮을 거다.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 걸. 나도, 아이들도 아직은 모두 적응하는 중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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