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이 있다면 내가 니 딸로 태어날 거야. 꼭.
그러니까 태권도를 다닌 지(라고 쓰고 아빠가 떠난 지라고 읽는다) 이제 보름 되었다. 여전히 적응 중이긴 한데, 엄마는 PMS를 맞이하여 상태가 더 안 좋고 9살 딸아이도 포스트 이혼증후군을 겪는 건지 요즘 엄마 말 귓등으로도 안 듣기를 밥 먹듯이 한다.
전날 저녁에도 탈곡기로 영혼까지 탈곡하듯 탈탈 털린 딸아이는 아침에도 엄마의 독촉과 독설에 떠밀려 등교를 했다. 아이알리미로 학교에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 둘째 등원까지 마친 후 돌아와 아침밥 먹은 식탁이며 애들이 벗고 나간 잠옷을 정리하다 책상을 봤는데,
아니 이게 뭐야?
무려 열 번이나 엄마 이름을 빨갛게 써 놓은 종이가 책상 위에 있었다. 어떡하지. 외국 살다 와서 그런지, 아직 이런 건 잘 모를텐데, 설마 이게 뭔지 알고 내 이름을 빨간 색연필로 쓴 건가? 파스타 병 소스로 저녁밥을 챙겨줬을 때처럼 또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거면 좋겠다 생각하며 종이를 따로 챙겨두고는 열심히 밥벌이를 하고 돌아와 저녁에 아이들과 재회한 뒤 딸아이에게 물었다. (정말 궁금했다.)
"공주, 이거 뭐야? 왜 쓴 거야?"
"아, 엄마 이름 써 봤어. 빙고 놀이 한 거야."
딸아이는 크게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지금 저 말을 믿으라는 건가? 믿어야 하나?
"진짜? 공주야, 한국에서 빨간색으로 이름 쓰는 거 무슨 뜻인지 알아?"
"몰라."
"진짜? 학교 가면 친구들한테 제일 먼저 배우는 게 그걸 텐데?
"모르는데에-"
같은 반 준영이한테 물어볼까 보다, 너한테 그걸 알려준 적 없는지, 막 그러던 차에 툭하고 말을 던져 봤다.
"공주야, 근데 엄마 이름을 참 많이도 썼다. 저거를 쓰고 나니까 마음이 좀 풀렸어?"
어, 쪼끔.
쪼끔이요? 쪼끔이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쪼금이라고 말하는 아이 얼굴에 순간 짜릿한 해방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더니 멋쩍어서 미처 다 참지도 못한 웃음이 배실배실 안면근육을 뚫고 나오는데 아아, 내가 저 귀여운 표정을 얼마 만에 보는 거더라.
딸아이의 표정이 너무 반갑고 사랑스러워 나도 같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슬프고 미안한 마음까지 다 사라지진 않았지만.
정말이지 탈탈 털고 싶지 않았다. 혼낸 일이 빨갛게 쓴 내 이름으로 가득한 종이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이를 탈탈 턴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탈탈 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곱게 말했다.
"그렇게라도 니가 마음을 풀었으면 된 거지. 마음 조금 풀었으면 됐어. 괜찮아. 거짓말은 안 하면 더 좋고. 알겠지?"
"응ㅎㅎ"
“엄마가 화 많이 내서 미안해.”
“어, 괜찮아.”
포옹으로 마무리한 뒤 지난 번 먹고 남은 파스타 소스로 리조또를 만들어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이혼에도 허니문 기간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딸아이와 나는 분명 허니문을 보내는 중이다. 박 터지게 싸울 일이 아직 많이 남은 듯하니까.
(아아 신이시여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