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엄마, 첵스를 세트로 샀네요?
"어, 여러 개 있길래 골고루 사 봤어."
"와아, 엄마, 고맙습니다아~~!!"
첵스가 뭐라고 딸아이가 이렇게 좋아할까.
키자니아에 갔을 때 시리얼 만드는 체험을 했었는데, 우리집 공주랑 왕자는 그날 신세계를 경험했다. 후르츠링, 초코볼, 첵스 등 평소에 잘 먹어보지 못한 휘황찬란한 시리얼을 보고 홀딱 반해 버린 거다. 그동안 밋밋한 시리얼이나 그래놀라 위주로 먹이다가 무장해제를 했었더니 크리스마스 때 공주가 또 첵스 얘기를 하길래 그 자리에서 로켓배송으로 주문했다. 엄마는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당분간은 여러 가공육과 반조리식품 같은 초코 첵스에 준하는 맛있는 음식을 사 줄 일이 더 자주 있을 것 같다. 친구와 대화를 나눈 이후 현실과 조금 더 타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 자꾸 화가 나. 애들도 아빠가 없으니까 말을 더 안 듣는 거 같애.
독박 육아를 길게 하는 동안에도 잘 몰랐던 사실인데, 한 사람이 화를 내거나 혼을 내면 다른 한 사람은 말리면서 서로를 진정시키는 기능을 수행했더라.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피곤하고 지친 상황이고 아이들도 아빠의 부재 때문에 이전보다 힘들어졌을 테니 지금은 우리 모두 특수한 시기를 보내는 셈이다.
부모, 아이 할 것 없이 가족 구성원은 모두 이혼 당사자였다.
그러니 나는 퇴근 후 아이들이 일과를 잘 마무리하도록 닦달하는 게 고되고, 집에 와서 엉덩이 한번 붙이지 못하고 저녁밥 챙기는 엄마의 수고를 헤아릴 줄을 모르는 어린이들은 온갖 잔소리를 곱지도 않게 반복하는 엄마 말이 당연히 듣기 싫다. 크리스마스라고 친구가 안부 전화를 했길래 근황을 나누다가 친구에게 애들이 말을 안 들어서 내가 자꾸 나쁜 엄마가 되는 것 같다고 앓는 소리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야, 내가 소리를 지르다가 진짜 천장이 날아가는 줄 알았어. 똑같은 말을 열 번을 해도 애들이 귓등으로만 듣는다니까? 오은영 박사님이고 나발이고 진짜 쳐다도 보기 싫어. 나는 너무 썩어빠진 거 같애."
친구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나에게 도움의 말을 건넸다.
"언니, 양육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아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초자아로 형성이 돼요. 어렸을 때, 특히 배변훈련 시기에 엄격하게 하면 아이들이 참는 법을 배우면서 완벽주의 강박이 생기는 경우가 많거든요. 다른 일에도 그렇게 되기가 쉽구요. 언니가 그걸 이해해야 해요."
그러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강조하되 지엽적인 것에는 느슨하고 싶었다.
"알겠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애. 주의할게. 내가 자꾸 혼내고 언성을 높이니까 애들도 덩달아 그러는 거 같애, 나한테도 짜증도 엄청 내고, 자기들끼리도 더 많이 싸우는 것 같고. 내가 애들 국밥처럼 다 말아먹고 있어. 쟤네들 저러다 나중에 커서 큰일 나면 어떡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원래도 애들이 종종 다투지만, 최근에는 어쩐지 아이들이 평소보다 더 자주 싸우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친구가 해 주는 말이 참 이상했다. 진짜 심각한 학대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화를 낼 줄도 모른다고, 저항할 줄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화를 내고 사나워지는 게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 회복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몸부림이자 희망의 시작이라고도 말했다.
애들이 나한테 화를 내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니, 이런 거에서라도 위로를 얻어야 하는 내 처지가 우스웠다.
"아이들의 공격성에는 이유가 있어요. 지금은 언니도 너무 힘들고, 자세히 표현은 안 하지만 아이들도 분명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이니까. 그래도 아이들이 언니한테 짜증을 내는 건, 언니가 아이들의 비빌 언덕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언니는 애들한테 잘해주려고 정말 노력하잖아.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이 분명히 언니한테 고마워할 거예요."
"그럴까? 내가 이따위로 하는데도 내가 비빌 언덕인 걸까? 기냥 내가 엄-청 만만한 거잖아. 내가 화내니까 그걸 모방해서 나한테 똑같이 하는 거잖아."
"엄마잖아요, 언니는. 언니, 언니는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를 오래 방치하면서까지 희생하면서 좋은 아내, 좋은 엄마로 살기 위해 너무 애를 많이 썼어요. 이제는 그런 언니 자신을 돌아봐야 해요. 지금은 언니가 스스로와 아이들을 잘 돌 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죄책감 없이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에요. 언니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를 생각해 봐요. 언니는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는 것보다는 먼 길을 돌아서 이제 언니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에 좀 신경 쓰도록 해요. 언니가 아이들과 함께 있어 주는 것, 아이들을 책임지기로 한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언니는 아주 대단해요."
죄책감. 사람들이 애들 잘 키운다고, 내가 아이들 키우는 걸 보고 많이 배운다고 할 때도 언제나 내 발목을 잡아온 그것.
나는 이제 몹쓸 죄책감으로부터도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러고 싶다. 나는 지쳤고, 내가 편해져야 아이들도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
한동안 첵스를 막 먹이고 테레비 유튜브를 실컷 보여준다 한들 크게 괄목할 변화는 생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지면 우리 모두는 이 힘든 시기를 조금 더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못난 엄마라고, 또 몹쓸 짓을 했다고, 나는 형편없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이것뿐인 것 같아서.
웃기지만 첵스를 샀을 때 그런 마음이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 많이 하게 해 주자. 대충 먹고 살자. 이미 아이들을 창의적이고 자유롭게 키운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물론 나 편하게 살자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조금 더 느슨해지자고 다짐했으니까, 그 시작이 첵스인 셈이다.
오늘 아침에도 우유도 없이 첵스 레인보우를 주워 먹은 왕자에게 우유를 조금 준 뒤 나도 첵스를 몇 알 집어 먹고는 입을 쩍 벌려 이빨을 다 보여줬다.
"왕자, 엄마 이빨 봐봐. 어금니에 첵스가 많이 붙어있지?"
"응."
"그럼 왕자 이빨에는 첵스가 붙었을까, 안 붙었을까?"
"붙었어."
"첵스가 이빨에 계속 달라붙어 있으면 어떻게 될까?"
"썩어."
"그럼 안 썩으려면 이제 뭐 해야 돼?"
"이빨 닦아야 돼."
"가서 이빨 닦고 오자?"
엄마의 질문은 답정너일 때가 많지만, 깨우침을 주기에 질문 만한 것이 없으니까 엄마는 오늘도 질문 폭격으로 아이를 양치하게 만들었다. 이빨은 넘나 소중하니까.
"엄마, 근데 첵스가 몸에 되게 좋아, 알아? 첵스가 비타민도 많이 있고, 엽산. 엽산이 뭐야? 엽산도 있고 철분이랑 아연이랑 칼슘도 있대. 이걸 먹으면 비타민을 안 먹어도 되겠어!"
어 그래. 실컷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