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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Jan 18. 2023

수습하고 싶다, 내가 만든 “결손” 가정.

한부모가정이지만 결손가정은 아니고 싶어


휴대전화 번호가 바뀐 이십년지기 친구를 수소문했고, 마침내 연락이 닿았다. <나의 발칙한 이혼 일지> 중 몇 편을 보내면서 내가 이혼 중인 사실과 조언이 필요하다는 용건을 문자로 남기자 친구가 퇴근하며 전화를 걸어왔다.


“도비야, 아까 퇴근 전에 너 글 쓴 거 보면서 내가 눈물이 나더라. 승화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 게 승화해서 글 쓴다는 거구나 했어. 그리고 웃기기도 해서, 너답다 싶더라고. 힘든 일을 겪었지만 너는 잘 이겨나갈 수 있겠다 그런 생각도 했고.“


비슷한 말을 슬의생 의사 선생님한테서도 들었는데 또 들어도 위로가 되었다. 전혀 잘 이겨나가진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니 말 듣고 보니까, 내가 일하면서 한부모가정에서 자란 친구를 딱 한 명 만났어! 나도 니 얘기 듣고서야 알았어.”


그동안 현장에서 한부모가정 아이들을 열 명은 봤겠지 하고 지레 짐작했던 나는 뜻밖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그래도 나보다는 더 전문가인 친구에게서 조언을 받고 싶었으니 나부터도 편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혹시나 그런 아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어떤 모습이 있다거나, 공통적으로 포착된 어떤 아쉬움이 있었다면 묻고 싶었다고. 관련 이론서적이나 사례집도 있으면 소개받고 싶었다고 말이다.


한부모가정처럼 보이는 게 싫은 게 아니라, 한부모가정이 놓치기 쉬운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다. 이미 삐걱대기 시작한 것도 같았고.


“어, 근데 말했다시피 내가 한 명 밖에 못 만났네.”

“너 사는 데가 그런 특징이 있나? 아, 근데 그런 건 있더라. 애들이 많이 어리면 사람들이 이혼을 미루더라고.”

“맞아, 그런 면도 있을 거야.”


그렇게 대답한 친구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

  

“도비야, 근데 내가 니 글을 읽고 느낀 건데, 너가 정말 너무 오래 참은 거 같애서 엄청 안타까웠어. 좀 더 일찍 이 결정을 했으면 니가 덜 힘들었을까?“


처음 듣는 물음에 내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왔다.


“음. 맞아, 둘째 임신 중에 한 번 집 뛰쳐나오면서 둘째는 태어나면 내가 시댁에 보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 적 있어. 암튼. 나는 정말 많이 참았고, 정말 힘들었어. 근데 그렇게 오랜 고생 끝에, 오랜 고민 끝에 아주 아주 힘들게 이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이제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 사모님이 이렇게 이혼하기 정말 쉽지 않아, 알지?”


고생이 많았다며 위로를 건넨 친구가 이야기를 마저 들려줬다.


“어쨌든 내가 본 그 아이는 처음 맡았을 때 어머니가 먼저 얘기를 하셨었어. 나는 내가 처음 만난 한부모가정이라서 깜짝 놀랐지. 근데 먼저 그렇게 사정을 얘기해 주신 게 교사인 나한테는 도움이 됐고. 그 집은 이혼한 지 2년 됐는데 폭력이 있었대. 그래서 어머님이 그 아이랑 남동생 데리고 이혼했는데 어머니가 아이랑 충분히 소통을 잘했다는 인상을 받았어. 그 친구가 나한테 이렇게 얘기하더라고. 아빠가 엄마를 힘들게 해서 같이 안 사는데, 그래도 자기는 아빠를 가끔 만난다고.”


다섯 살, 두 살을 데리고 이혼했다니, 말만 들어도 그 엄마는 얼마나 슬펐을까 싶어 마음이 아려왔다.


“이혼사유가 폭력이면 면접교섭을 자주 안 할 수 있을 것 같애.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어머님이 애들 앞에서 내 험담만 안 하시면, 혹시 하시더라도 남편이 그걸 말릴 수만 있으면 아이들이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자주 보면 좋겠어. 첫째가 이혼 얘기 듣고 제일 먼저 한 걱정이 전학 가기 싫은 거랑 할머니 할아버지 이제 못 보냐는 거였거든. 그래서 내가 그랬어, 엄마가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할머니 할아버 집에 데려다줄 수 있고, 거기 가서 재밌게 잘 놀고 와도 된다고. 남편이랑도 보고 싶으면 보러 와도 된다고 말했어. 나는 남편이 내 남편인 걸 멈추고 싶은 거지, 애들한테서 아빠를 뺏고 싶은 게 아니니까 아이들이 아빠랑 좋은 시간 많이 보내고 추억도 많이 만들면 좋겠다고. 나도 그때 좀 쉴 수 있지 않을까도 싶고.“

“다행이다, 얘기가 잘 돼서. 그 친구도 엄마랑 얘기를 충분히 잘 나눴더라고.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고 밝았고, 그래서 내가 되게 좋게 봤어.”


그리고서 이어진 친구의 말에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참, 그리고 너한테 이 말을 해 주고 싶었어. 한부모가정이라도 애들은 충분히 잘 클 수 있어. 나도 맞벌이가정이긴 한데, 맞벌이가정에서도 부모가 다 피곤해서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아이들이 방치되는 경우도 있거든.”


친구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니가 애들 둘을 혼자 키우면 정말 힘들 거야. 너도 이미 그걸 잘 알고 있을 것 같고. 그러니까 나한테 연락도 했겠지? 그래도 양육자가 지혜롭게 잘하면, 한부모가정이라도 맞벌이가정 애들보다도 더 잘 클 수도 있어. 엄마가 시간 조절을 잘해서, 뭐 그 집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그런 건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정서적 지지도 많이 받았었고, 옷도 더 깨끗하게 단정하게 잘 입고 다녔어. 성격도 좋고.”

“……그 어머님이 원래 잘 챙기시는 분일 수도 있고, 자격지심이랑 피해의식에서 나온 걸 수 있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는 벌써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이 생겼다. 학교에서, 어린이집에서 아빠 얘기가 나와서 혹시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아이들은 괜찮을까. 어쩌다 손톱 깎는 걸 깜빡하고 준비물을 깜빡하면, 원래도 잘 깜빡하기도 하는 엄마인데 아빠가 없어서 엄마가 못 챙겼다고 공연히 더 속상하진 않을까, 혹여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그렇게 보진 않을까.


나 어릴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외국에서 아이들을 기관에 보내고 그쪽 이혼 가정들 사는 것도 봐서 그런지, 한부모가정이 그렇게 흔하지도 않고 제도가 미비한 게 실감 난다. 그래서 자꾸 더 마음이 쓰이고 그래서 자꾸 더 내가 부족한 것 같고 그래서 자꾸만 더 걱정도 되었다.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니가 부담감에 억눌리지 않는다면, 니가 원하는 모습대로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공주랑 왕자는 잘 클 수 있을 거야. 나는 니가 힘들겠지만 잘 해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벌써 준비하고 알아보고 있잖아. 우리 와이프도 지금 유치원에서 근무하거든? 내가 물어볼게. 그리고 니가 쓴 걸 보니까 내가 다 반성이 되더라.”


또 이런 얘기. 뜻밖에도 이혼하며 남의 가정 행복지킴이가 되고 만 나 자신.


“내가 지금 이 얘기를 한 서너 번째 들어. 있을 때 잘해야 해, 지킬 수 있을 때 온 힘을 다해서 꼭 행복을 지켜. 나는 세상에 나처럼 슬픈 사람은 아무도 없으면 좋겠어. 너도, 네 아내분도 슬프지 않으면 좋겠어. 둘이 함께라서 더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어. 내가 급해서 오랜만에 연락했지만 아내분한테 실례 같아서 앞으로 따로 연락하는 일은 아마 없을 거야.“


그러니까 친구가 또 그렇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자기가 그동안 아내한테 서운하게 한 건 없는지 많이 돌아봤다고.


“도비 니가 잘 써서 그런지, 읽으니까 내가 너무 반성이 되더라.“

“의도한 적 없는 결과란다. 내 썩은 삶이 이렇게라도 누군가에게 거름이 된다니, 나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은 소중하지만, 일 중독으로 살지는 마. 행복에 공을 들여. 혹시 시간이 되면 우리 집에 일어난 불행을 아내분과 나눈 후에 손 꼭 잡고 기도하렴. 그리고 아내분한테 한부모 가정 아동 보육 경험이랑 관련 서적 물어보고 그것만 좀 알려 주라.“

“그래, 그렇게 할게. 잘 지내고, 딱히 도움을 못 줘서 미안하네.”

“아냐, 조언을 구하는 부분에서 내가 처음 바랐던 도움은 아니었지만, 아까 너가 해 준 얘기에서 찐으로 위로를 얻었어. 맞벌이가정 아이들보다 이래저래 모자라게 누리며 자라겠지만 그래도 애들 덜 주눅 들게 키우는 거, 잘 설명해 주는 거, 고민하고 노력할게.“


건강해라, 잘 지내라, 조심히 들어가라, 고맙다, 하는 특별할 것 없지만 진심 담은 인사를 끝으로 친구와의 통화를 마무리했다. 주말에는 초등 교사, 고등 교사인 친구들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와 주었고, 두 친구가 같이 서울에 온 건 내 결혼식 이후 십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 나는 그게 참 고마웠다. 너무 반가웠던 나머지 다음에 또 서울에서 만나려면 재혼이라도 해야 하는 거냐고 너스레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주 먼 옛날 남편과 알콩달콩 연애하던 시절, 판검사 집안에서 자라서 아들을 삼수시켜 법대 보낸 지인이랑 얘기하다 놀란 적이 있었다. 아들의 국민학교 겨울방학 숙제 책에 나오는 과제 때문에 건축학과 교수님을 찾아갔었다는 말을 듣고 토종 강남엄마 치맛바람은 정말 장난 아니구나 싶었는데, 엄마가 되고 보니 당시 지인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던 점을 반성하게 되었다. 애미가 절박하면 뭔들 못할까. 나 역시도 첫째 낳고 가습기를 살 때 병리과 교수님께 해당 제품의 안전성을 묻지 않았던가. 힘들 때일수록 도움을 구할 줄 알아야 한다.


슬픔을 함부로 휘둘러도 되는 무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너무 오래 속으로만 삭이면 결국은 탈이 나기 마련. 아무리 참아도 언젠가는 새어나갈 수밖에 없는 아픔이 있다면, 둑이 터지기 전에 미리 손을 쓰는 게 낫다.


물론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을 줄도 알아야 한다.


한부모 가족은 구조적으로 “결손 가정”으로 분류한다. 구조에 “결원”이 생긴 건 되돌릴 수 없겠지만, 심리적으로 만큼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더 망가지지 않고 잘 회복하고 싶다. 가족 구성원에 결손이 생겼다고 해서 나의 “홈 스윗 홈” 마저 결손이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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