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파리 콩콩 찌어 벽돌 가루로 색을 입혀 놀던 어린 시절의 골목길은 이제 없다.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그런 공간과 시간은 사라졌다. 지천으로 떨어져 흩날리던 꽃잎과 이파리 대신에 아이는 삼층짜리 인형의 집을 선물 받거나 컴퓨터 게임 안 가상공간을 찾아가서 머문다. 어른은 인형의 집과 컴퓨터, 게임기를 살 돈을 버느라 꽃잎 줍던 어린 날의 기억을 감금하고 놀이터를 지운다.
어떤 기쁨과 어떤 슬픔, 어떤 울분 같은 것이 가슴 한편에 쌓여가는데, 그걸 꺼내 보는 것도 두려워 오늘의 나, 내일의 나만 바라보며 달렸다. 몸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판도라의 상자에는 용기와 도전, 절망과 기대할 수 없는 희망 같은 것들이 쌓여간다. 밀어 넣기만 할 뿐 꺼내어 확인하지 못할 찌꺼기로 가득 찬 상자. 희망도 갖기 어렵지만 절망과 재앙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닫아 두었다. 내 얘기다. 근데 실은 우리 언니들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자고 친구들과 모의하던 날,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가 더 옳은 표현일까? 온갖 것들이 다 튀어나오는 데 희망만 가둬진 판도라 상자의 본질이 떠올라서다. 그러나 결국 열리고야 마는 것 또한 판도라 상자의 본질이다. 가볍게 시작하자. 깃털처럼 가볍게. 언니들과 함께 모여 판도라의 상자를 열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 공간에 멍석을 펴고 차를 따르고 그 외에는 다른 무엇도 기대하지 말 것.
미시간에 사는 언니들을 향해 초대장을 보냈다. 보낸 이는 공백찻집. 누가 보낸 지도 모를 초대에 응한 열 명의 언니들이 찻집을 방문했다. 훗날 언니들이 될 작은 언니 셋도 함께 모였다. 처음 보는데 낯설지가 않다. 우리네 얼굴은 왜 이리도 익숙하게 닮아 있을까. 비슷하게 슬픈 상자들을 안고 살아서일까. 언니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왔을까? 좀 놀아본 언니들의 놀이가 시작됐다.
상자가 열린다. 멍석 하나 깔았을 뿐인데 세 시간이 짧다. 몸을 움직이고 마음도 움직여가는 시간. 언니들의 놀이는 재앙, 질병, 절망에 희망까지 다 내보낸 공백을 화두로 한다. 고요하게 깊은 공백 한가운데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세상을 새롭게 짓는다. 온전한 나의 세상. 세상의 잣대가 만든 나 말고 내가 만든 나, 어느 누구의 눈도 개의치 않는 나를 발견하는 거다. 기존의 세상이 나를 파괴했다면, 공백의 세상에선 나를 다시 탄생시킨다. 나의 세상은 너의 세상과 연결되고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지어가는 놀이를 시작했다.
골목길을 나와 신작로를 따라 걷다 도착한 이곳 공백찻집. 이제 난 다시 기대하고 꿈을 꾼다. 언니들의 놀이터 공백찻집. 언니들에게 놀이터는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