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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숲섬 May 06. 2024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

자세히 빌어야 할까, 큰 틀로 빌어야 할까: 디테일과 두루뭉수리 사이에서

 제주에는 1만 8천의 신이 좌정해있다고 한다. 교육받고 머리에 좀 든 게 있는 사람들이 보면 미신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무속신앙이 공공연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걸 '문화'라고 보고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요소들이 많다. 최근 '인간적으로'라는 프로그램에서도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심리를 좀 다루었고, 영화 [파묘] 이야기도 이것과 조금 관련이 있지 싶다.(영화를 안 봐서, 유튭에 있는 관련자료도 안 봐서 잘 모름)


제주이야기, 미신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미신이나 점 같은 것에 기대는 이유가 불안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에 적극 동의한다. 작년에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절에 다는 '가족등'이라는 것을 했다. 유명하고 영빨 좋은 스님이 빌어준다는 말에 혹했다기보다는 그것을 주관한 단체에 고마움을 표하는 차원에서 그냥 뭐랄까 희사한다는 기분으로 신청해서 달았다. 엄마가 모란봉교회(이름에서 느껴지듯 탈북자들의 교회이다)에서 행사를 하신다기에 '헌금'명목으로 현금을 드렸다. 그런 작은 교회들은 운영이 참 어렵다. 그냥 도와주는 차원에서......


 올해는,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올해는 어쩐지 자꾸만 마음이 가난해져서, 돈을 쓰는 일을 주저하게 된다. 돈이 없다. 수입도 없다. 그것이 이제야 비로소 막막해지고 암담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뭔가 절실한 마음에 방금 전 입금을 했다. 내 종교가 무엇이냐... 하.... 제주도 1만 8천 신이 사는 곳이 내게 잘 맞는 건, 여기는 종교적으로 뭔가 강요하는 분위기가 없다.


교회에 낸 헌금봉투에는 다음과 같이 빌었다. 

5월 9일 석사논문완성

6월 11일 석사논문청구심사통과

8월 21일 대학원 졸업

9월 박사과정진학

제주에 집 장만.


요즘 나의 98%는 이렇게 오로지 석사논문밖에 없다(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잡다하게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교회 기도제목과 비슷하게 절에 다는 가족등에도 썼다. 가족등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이렇게 많이 쓰시면, 스님들이 건너뛰고 대충 읽으시니 '만사형통', '사업번창' 등과 같이 4자 내지 6자로 읽기 좋은 말로 바꿔주세요라고....


래서 결국 나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내가 바라는 바를 이렇게 정리해서 보냈다.  

1. 석사통과 박사진학

2. 심신건강

3. 석사진학

4. 인생방향설정


이런 행위, 신에게 뭘 해달라고 조른다기보다는

이런 과정을 통해 내 안에서 원하는 게 뭔지, 가족들이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 생각하는 계기를 준다. 저렇게 날짜를 쭈르륵 나열해 가며 자세히 적는 이유는, 물론 논문에만 집중하게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달라는 바람도 있지만 나 스스로 하는 결심이며 굳건히 다지는 일이다.


디테일하게 자세히 세세하게 적어 기도하는 게 잘 이루어질까, 아니면 크게 퉁쳐서 '행복하게 살게 해 주세요(행복이 무어냐.... 그건 언제 오느냐.. 그것이 무엇이길래)'처럼 하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걸까.



덧 1.그러나 생각해 보니, 내가 2021년 제주대에 진학하며 내내 나의 소원은 '석사논문'관련이었다. 처음엔 논문 주제 잡게 해 주세요였고 그다음부터는 줄곧 논문 완성하게 해 주세요였구나. 나는 6월 11일 청구심사 전에 논문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오늘도 논문 쓰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여기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고 있구나....(한숨푸욱~)


덧2. 가족등. 원문.

1.5월 9일 석사논문완성, 6월 11일 석사논문청구심사통과, 8월 21일 대학원 졸업, 9월 박사과정진학, 제주에 집 장만.

2. 건강, 탄탄한 경제적 수입과 넉넉한 베풂

3. 졸업, 다음 단계에 대한 정당한 고민

4. 복학, 치열한 인생을 위한 충분한 방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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