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가짐에 대하여
배꼽.
오랜만에 이 단어를 들었던 것은 여름에 한창 빠져있던 만화책에서였습니다. 개구지고 순진한 다섯 명의 남자 고등학생 친구들이 나오는 만화입니다. 하루는 부활동으로 다도를 하고 있는 두 소년, 슈운과 유타가 화과자에 눈을 반짝거리는 나머지 친구들을 방과 후 다도 수업에 초대합니다. 차분하고 조그마한 다실에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쪼르르 앉은 친구들에게 슈운은 말합니다.
“먼저, 기본적인 앉는 방식부터 가르쳐 줄게.”
하지만 얼른 화과자나 맛보고 싶은 친구들에게 격식 따위는 따분합니다. “에이~ 앉는 방식이 뭐가 중요해?”라고 입을 내밀고 투덜거릴 뿐입니다. 그렇지만 슈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단호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안 돼. 일어서고 앉을 때의 아름다운 행동거지도 다도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야.”
그러면서 먼저 시범을 보입니다. “자, 이렇게 배꼽을 앞으로 쑥 내밀듯이 등을 꼿꼿하게 펴고 앉으세요.”
“됐다니까 그러네~”
“자세가 아름다워야 훨씬 멋있어.”
흥, 자세 하나로 멋있어지면 누군들 안 하냐! 하며 계속 실랑이를 벌이던 친구들은 어느새 옆에서 의젓하게 등을 꼿꼿이 펴고 앉아 있는 유타를 보고 나서야 정말로 멋있고 아름답다는 걸 느끼고선 하나둘씩 본인들의 자세를 바로잡기 시작합니다. “야, 배꼽...이 어쨌다고? 앞으로 튀어나오면 멋있댔지?!”
참 철없는 친구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그런 그들의 마음이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차를 마시는데 가장 먼저 난데없이 앉는 자세를 바로잡으라니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일일시호일>이라는 다도를 다룬 영화에서도 비슷한 일화가 나옵니다. 부모님이 등을 떠밀어 다도를 배우게 된 노리코는, 처음에는 고작 차를 한 잔 마시는데 왜 이렇게나 번거로운 규칙과 격식이 많은지 불만입니다. 오랫동안 쭈그려 앉는 탓에 다리만 저릴 뿐이지요.
하지만 다도라는 것은 차를 마시는 것을 넘어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의식입니다. 화경정숙(和敬清寂). 다도의 정신을 집약한 말로, ‘사람을 공경하여 온화하고 정결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다도에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바른 자세를 갖추는 것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다가옵니다.
바른 자세를 유지하려면 평소와는 달리 긴장이 들어가게 됩니다. 주의 깊게 의식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 다시 흐트러지게 되지요. 일부러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지는 자세를 취해, 의식하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 그래서 계속 집중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 냅니다.
그렇기에 다도를 하기 앞서 앉은 자세부터 바로잡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의식적으로 두겠다’라는 얌전하고 경건한 각오인 동시에, 마음을 쏟으려는 대상이나 순간을 향한 곧고 투명한 몸가짐인 것입니다.
‘몸가짐’.
사전의 뜻에 의하면 ‘몸을 거두는 일’이라고 합니다. 거둔다는 것은, 벌여놓은 것들을 정리하는 일. 흩어져 있던 것들을 한데 모은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단정한 집중’입니다.
‘-가짐’이라는 어미는 의식적인 집중을 움직임과 자세라는 물리적인 형태로 보여주는 단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형태에 마음을 담는다’라는 말은 이런 의미일까요. 그러니 앉은 자세를 넘어 ‘앉은 가짐’이 필요한 순간도 종종 있는 것입니다.
일본 드라마 <츠바키 문구점>에서 주인공 포포가 편지를 대필하기 전에 붓을 잡고 경건히 바르게 앉는 것, 사극 드라마에서 왕이 기품 있는 두 어깨를 펴고 근엄하게 앉는 것, 면접을 볼 때 옷깃을 단정히 하고 두 발을 모아 공손하게 앉는 것.
이 순간을 위해 잠시 흩어져 있던 나의 마음을 고이 모아 얌전히 놓아두겠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일을 이제 시작할 준비가 다 갖춰졌다는 뜻이지요. 땅! 소리가 울리면 땅을 박차고 뛰어나가는 러너 같은 역동은 없지만, 고요하고 산뜻한 출발을 알립니다. 바르게 앉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들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가짐’들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듣는 가짐.
쓰는 가짐. (Write도 되고 Use도 되겠군요)
읽는 가짐.
입는 가짐.
일상 속에서 평범하게 하는 동작들에 ‘-가짐’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왜인지 다가오는 무게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매 순간 어떤 자세로 있을 것인지 고르는 것으로 우리는 흩어진 마음을 한데 모아두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배꼽, 하니 생각나는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연준 시인의 산문집 <소란>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는 꼭지가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라고 하면서 이런 문장을 덧붙입니다. ‘꼭지는 존재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손잡이이자, 문장을 닫는 마침표다.’ 그리고 우리 몸에 있는 여러 꼭지와 함께 배꼽에 대해서 말합니다. 시인의 그런 문장을 읽으니, 은밀하고도 중심에 있는 부위, 근원과의 연결을 간직한 배꼽을 상대를 향해 곧게 내보인다는 것은 공경한 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현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마무리 짓기 전, 다시 만화에서의 이야기입니다. 건방지고 떠들썩한 친구들이 먼저 하교한 이후, 차분한 정적이 내려앉은 다실에 다시 슈운과 유타만이 남습니다. 유타는 친구들을 가르쳐주고 차를 내어주느라 정작 다도를 즐기지 못한 슈운을 떠올리며 그를 위해 차를 내려줍니다.
다도에서는 차를 내어주는 사람이 이렇게 묻습니다. “느낌은 괜찮습니까?” 그러면 마시는 사람은 “매우 괜찮습니다.”라고 응하는 것이 예입니다. 하지만 고3인 슈운은 아까부터 진로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꽉 차, 도무지 차의 맛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유타가 묻는 말에 근심 가득한 얼굴로 결국 이런저런 고민을 횡설수설 쏟아내고 맙니다. 유타는 그런 슈운의 말을 들으며 얌전히 기다려주지요.
그러다 딱 한 마디를 내뱉습니다.
“배꼽”.
슈운은 아차, 싶어 꼭 숨어있던 배꼽을 내밉니다. 침울해서 한껏 움츠러든 어깨와 등을 활짝 펴고, 잠시 딴 데 팔려 있던 마음을 다시 이 자리로 데려옵니다. 그런 그에게 유타는 다시 한번 미소 짓고 묻습니다.
“느낌은 괜찮습니까?”
그제야 슈운은 쑥스럽게 웃으며 답합니다. “매우 괜찮습니다”.
저도 생각이 많을 땐, 배꼽을 앞으로. 여러분도 생각이 많을 땐 배꼽을 앞으로. ‘앉은 가짐’에 대해서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고선 산뜻하게 웃으며 말해보는 것입니다.
“매우 괜찮습니다”.
저에겐 글을 쓰다 보면 잘 써지는지 모르겠고 길을 잃은 듯한 느낌에 헤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땐 곧게 세웠던 몸도 힘을 잃고 앞으로 쓰러지고 있겠지요. 그럴 때 ‘배꼽’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시 이 순간으로 되돌리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지요. 느낌은 괜찮습니까? 그러면 에잇,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웃으며 답해버리는 겁니다. 산뜻하게.
매우 괜찮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렇게 속으로 읊조리며 마침표를 찍어 봅니다.
*추신. 이야기 속에 등장한 만화는 홋타 키이치 작가의 <너와 나>라는 작품입니다. 해당 에피소드는 9권에 등장합니다.
*닢(라이프마인드) 네이버 블로그를 시작했어요. 연재글 외에도 소소하고 편안한 일상 이야기도 해 보고자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