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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시 Nov 03. 2024

가을을 담은 책을 읽습니다

문호들이 그려낸 가을의 일상들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가을이 오면 이 문장이 떠오릅니다. 이 말은 94세로 세상을 떠난 현역 최고령 의사였던 한원주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계절이 찾아오면 누군가가 남긴 계절을 반기는 문장들이 떠오릅니다. 옛 시절의 많은 문인들도 새로운 계절이 왔음을 알아차리면 부지런히 붓과 펜을 들었습니다. 눈앞에 불쑥 찾아온 계절에 당혹해하면서도 반가워했던 건 비단 저나 선생님만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햇살이 따사로운 가을날 일요일, 저는 창밖으로 열차가 지나가는 카페에 왔습니다. 고소한 버터 과자와 라떼, 그리고 책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오늘은 가을의 책을 읽고자 합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아늑하고 포근한 분위기의 카페에 가서 '계절의 책'을 읽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저의 책장 속에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꺼내 읽는 책이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책은 일본의 근현대 문호들이 저마다 바라본 계절의 풍경들을 고이 담아냈던 짧은 글을 엮은 <작가의 계절>이라는 책입니다. 하이쿠 같은 시집을 읽는 것도 무척 좋아합니다. <하루하루 하이쿠>라는 시집에도 마찬가지로 봄부터 겨울까지 사계절의 시가 한데 엮여 있습니다.


가을이 왔으니 가을의 챕터를 펼쳐 읽어봅니다. 다카하시 유메지의 <가을 눈동자>라는 시로 시작됩니다. 이어서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계절이란 비단 거리 위가 아니라 책상 위에도, 마당에도, 붓 끝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시를 위한 소재를 적어두었던 수첩 속의 가을 단어들ㅡ잠자리나 코스모스 같은 것ㅡ부터 발끝에 밟히는 낙엽과 코끝을 간지럽히는 금목서 향기, 쓸쓸한 저녁에 눈물짓게 하는 담배 연기, 이웃집 아이와 주고받은 감나무 열매, 사색 가득한 산책, 평소보다 적막과 외로움이 감도는 서재 등. 그 시절 문호들을 설레게 하고 때로는 쓸쓸함에 몸서리치게 했던 가을의 일상들이 열차 차창 밖으로 풍경이 지나가듯 정겹고도 소박하게 흘러갑니다.


저로서는 바쁜 일상을 살며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가을의 풍경을 마주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문인들이 소중하게 품었던 가을의 감정, 가을의 꽃과 풀과 벌레, 가을의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잊고 있던 단어들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가을바람. 들국화. 해질녘. 모기. 잠자리. 국화꽃. 수첩 갈피. 이슬. 억새풀. 그늘. 쓸쓸함. 가을비. 눈물. 귀뚜라미. 보름달. 벌레. 밤(栗), 등불, 배, 감, 긴 밤.


이처럼 책과 시 안에 적힌 아름다운 단어들을 곱씹습니다. 점자를 어루만지듯 책 위의 텍스트가 오돌토돌하고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옵니다. 계절을 담은 글을 읽고 있으면 계절의 단어들을 알게 됩니다. 계절의 감정들을 알게 되고, 계절의 생명들을 알게 됩니다. 계절이란 텍스트에도 깃들어 살아 숨쉬는 것입니다. 가을 저물녘 문득 느끼곤 했던 외롭고 쓸쓸한 감정이 나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창밖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의 정체가 무슨 벌레인지 알게 되면 흐뭇합니다.


날씨가 선선해지고 해가 짧아져도 매일의 나날은 그대로입니다. 푸른빛이 나는 모니터를 보며 일을 하고 똑같은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은 때때로 야속합니다. 나뭇잎도 옷을 갈아입는 이 계절, 조금 더 가만히 느끼고 싶은 것은 가을의 단어, 가을의 감정, 가을의 생명, 가을의 물건인데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누구보다 가을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원고지 위에 옮겨 왔던 문호들에게 살짝 기대봅니다. 그들의 어깨너머로 소란스러운 가을의 존재를 느낍니다. 일상 속에 깃든 미묘한 계절의 변화를 섬세하게 포착한 그들의 다정한 예리함과 글솜씨를 빌려, 내가 지금 어떤 풍경 속에 있는지를 실감하고 기억합니다.


계절 속에 나를 가만히 놓여 보는 것이 저에게는 생활을 단정하게 가다듬는 또 하나의 방식이랍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주변의 풍경을 묘사할 수 있는 힘, 그것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의 성실이니까요.


카페의 창밖으로는 여전히 열차가 지나갑니다. 열차가 지나갈 때마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사그락사그락거립니다.


저의 가을의 단어는 오늘 또 새롭게 쓰여집니다.


가을 저물녘, 창밖으로 지나가는 열차


추신.

"가을은 응시의 계절, 몰두의 계절,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는 계절이다." 도요시마 요시오는 <가을 기백>이란 글에서 말했습니다. 확실히 가을이란 자신의 내면을 차분하고 깊게 바라보고 쓸어내는 계절인가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에 취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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