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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곶감

가을간식

by 글굽는 제빵사


어린 시절, 외가댁에 자주 갔다. 맞벌이로 바빴던 엄마는 자주 할머니 손에 우리를 맡겼다. 어린 나이에 엄마 손을 놓는 것이 두려울 법도 한데 우리 자매는 오히려 신이 났다. 엄마의 애마, 빨간색 티코가 할머니 댁 앞에 서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망아지처럼 너른 들판으로 뛰쳐나갔다. 그곳은 우리의 지상낙원이자 최고의 놀이동산이었던 것이다.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로 둘러싸인 곳에 있다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푸른 들판에 서면 번데기처럼 쭈글쭈글해졌던 마음이 쭉 하고 펴지는 것 같았다. 숨이 나갔다.

마을 전체를 울창한 산이 감싸고 있고, 한가운데로는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흘렀던 소담한 촌 동네. 길가에는 언제나 이름 모를 들풀이 한 아름 펴 있었다. 바람을 파트너 삼아 이리저리 휘청이며 탱고춤을 추는 들꽃이 아름다워 자주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다. 시골길에선 청량하고 달큼한 공기가 맴돌았다. 동생 손을 꽉 붙잡고 굽이굽이 길을 따라 걸을 때면 아카시아꽃을 입안 가득 물고 있는 듯 입안에서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시골에서는 모든 것이 흥미로운 놀잇감이 됐다. 잠자리 통을 목에 걸치고 새빨간 고추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밭을 뛰어다니며 고추잠자리를 잡기도 하고, 배추밭에 들어가 메뚜기, 방아깨비를 쉼 없이 잡으며 놀기도 했다. 그러다 지치면 개울가에 앉아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헤엄을 치는 올챙이 때를 한없이 구경하기도 하고. 우리만의 어드벤처를 마음껏 즐겼다. 그렇게 온 동네를 휘저으며 뛰어다니다 보면 어디선가 우리를 찾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한집 두 집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할 그 무렵. 달콤했던 공기는 희미해지고 구수한 냄새가 뱃속을 자극하는 그 시간. 할머니는 다정한 목소리로 저녁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렸다.

한가운데 널찍한 대청마루가 자리한 고풍스러운 기와집. 입구에 들어서면 커다란 밤나무가 먼저 우리를 반겼다. 주로 우리는 대청마루에 앉아 밥을 먹었다. 넉넉히 올려진 고구마 감자 꾸러미, 그 옆으로는 정성스레 차려낸 음식이 있었다. 고소한 달걀 프라이, 김장김치, 밭에서 막 뽑아온 시래기를 아낌없이 넣어 만든 된장찌개까지. 따끈따끈한 감자를 호호 불며 한입 베어먹다, 개운하고 깔끔한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곁들이면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이 담겨서 일까. 차린 것 없이 소박한 밥상이 유난히 꿀맛이었다.
하루 종일 뛰어다닌 몸에서는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땀에 절여져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이마에 뒤죽박죽 눌어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마른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두툼한 손으로 이마에 붙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내 새끼 배고팠지. 많이 먹으라고. 그 다정하고 흐뭇한 눈길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사계절, 언제나 먹을 것이 흘러넘쳤던 할머니 댁. 여름에는 고소하고 쫀득쫀득한 옥수수로, 가을에는 달큼한 고구마로 배를 채웠다. 직접 메주를 쐐서 만든 집 된장도 할머니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였다. 평생 농사를 지으셨던 덕분에 건강하고 신선한 제철 음식을 실컷 맛볼 수 있었다. 특히 나는 곶감 킬러라 불릴 만큼 곶감을 좋아했다. 마당 입구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다. 여름내 푸르스름하던 감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이 되몀 호롱 불처럼 붉게 익었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긴 장대로 툭툭 나무를 건드려 감을 떨어트려주었다. 우리는 달콤하고 말캉한 감을 원 없이 먹었다. 할머니는 남는감으로 곶감을 만들었다. 실로 감을 하나하나 꾀어 주렁주렁 매달아 처마 밑에 달아 두었다. 건들바람에 스치는 감 표면은 할머니 얼굴 주름처럼 서서히 쭈글쭈글해졌다. 그 사이로 은근한 단내가 번졌다. 가을바람에선 할머니의 사랑처럼 달콤한 맛이 났다.

지금도 곶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을 간식이다. 아마도 그때 할머니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곶감 맛에 반한 탓이 아닐까. 어쩌면 취향이라는 건 다정했던 기억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곶감은 시중에서는 결코 맛보지 못한 쫀득함과 달콤함이 있었다. 그녀는 정성 들여 만든 곶감을 벽장에 가득 넣어두고 매일 밤 하나씩 간식으로 꺼내주곤 했다. 아무리 아껴먹어도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던 곶감이 어찌나 야속하던지.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면 언제 또다시 할머니의 보물 상자가 열릴까 애타는 눈길로 벽장을 지긋이 바라보다 잠들곤 했다. 깊어지는 가을밤 할머니가 손에 쥐어주시던 다정한 곶감이 유난히 생각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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