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첫 회사를 다녔을 때의 일이다. 입사한 지 2달이 막 지나던 때였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뎠기에 일하랴, 사회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입사했기에 팀은 물론 회사에서 제일 막내였다. 나도 모르는 일머리가 나에게 있었는지 눈치껏 일하고 행동했더니 감사하게도 모든 동료와 상사들이 예뻐해 주셨다. 단 한 사람 제목에 적은 여자 대리 빼고.
가끔 그 대리만 생각하면 부하가 치민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1년만 다른 곳에서 사회생활을 경험한 후에 만났더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에 남지 않았을 것 같다. 나에겐 좋지 않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그 대리도 일을 잘해서 동료들에게 평은 좋지 않아도 관리자급 상사들이 무척 좋아했다. 대리는 팀장님과 이사님 등이 있는 자리에 선 나에게 잘해주는 척, 챙겨주는 척했다. 그게 ‘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상사가 없는 자리에선 나에게만 유독 수직적으로 굴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팀 회식에서 팀장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00 이는 잘하기도 잘하지만 우리가 너무 칭찬만 하는 것 같아. 혼내기도 해야 하는데 하하” 웃자고 하는 소리에 옆에 앉아 있던 대리가 나를 쳐다보며 팀장님에게 대답했다.”다들 잘해주기만 해서 제가 엄격하게 하고 있어요” 그때의 표정은 웃음이 아니라 피식이었다.
그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명백한 이유로 나를 칭찬하면 옆에서 초를 치곤 했고, 보다 못한 다른 대리가 “다들 00 씨를 이뻐하니 0 대리가 꼭 시기 질투하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팀원들 앞에서 할 정도였다. 한 번은 출장을 갔다가 조개구이 집에서 조개를 먹는데 팀장님 앞에서 내 그릇 위에 조개를 올려놓는 것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평소 그녀가 나에게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그 행동은 무척 위선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업무적으로 지시할 때 이해가 안 돼서 다시 물어보면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말투로 대답해주곤 했다. 한번 알려준 건 무조건 기억해야 했다. 순진한 마음에 대리의 태도가 조금 무서워 물어볼 것도 못 물어보고 일을 하곤 했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사가 무서워 업무능력이 향상되었는 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의문이 든다.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면서 배우는 일의 방식이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2일에 걸친 행사가 있어서 지방으로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첫날 바쁘게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숙소로 들어갔다. 보통 출장 가면 밤 9~10시까지 일을 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늦은 시간이었으리라. 씻고 잘 준비를 하고 누웠는데 갑자기 배가 너무 꼬였다. 제대로 눕지도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심하게 꼬여 당장 응급실에 가야 했다. 혼자 나가서 택시 잡을 힘도 없어서 같이 일하러 온 다른 아르바이트생의 도움으로 응급실에 가서 조치를 받고 돌아왔다.
다음 날도 6시에 일어나야 했기에 팀장님께서 숙소에서 쉬라고 하셨지만, 혼자 쉬는 게 미안해서 행사장으로 갔다. 도착 후, 행사 준비가 어디까지 됐는지 보려고 배를 잡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세게 부여잡고 휙 잡아 돌렸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 인물이 앞에 가는 다른 인물을 화난 상태에서 소리치며 붙잡아 돌려세울 때 하는 행동과 같다. 너무 놀란 나는 그 힘에 몸이 자연스레 뒤로 돌아가 나를 밀친 사람이 누군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대리였다. “왜 여기서 가만히 있어!!!! 왔으면 빨리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순간 너무 울컥해서 눈물이 났다. 심지어 방금 도착했는데 이런 말을 듣자니 너무 억울했다. 그리고 나를 밀쳤다는 게 정말 화가 났다. 그 누구도 나를 밀칠 권리는 없다. 아니, 내 몸에 손을 댈 권리 자체가 없다.
지금의 나라면, 조금만 더 사회생활을 경험한 후에 이러한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때와는 달리 더 똑똑하게 대리에게 맞받아쳤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렇게 억울해서 생각나는 일도 없겠지. 그때 대리의 나이와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금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지가 않는다. 성격 차이로 볼 수도 없다. 그래서 그냥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그 순간 거기 서 있던 나는 똥을 밟은 거였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자리든 그에 딱 맞는 사람은 없어도 막상 자리에 앉으면 그에 맞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 되어간다는 말이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대리처럼 일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자리에 맞는 성숙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 남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권리를 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로지 그에 대한 결심은 본인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남에게 함부로 해도 되다는 권리. 실은 권리가 아닌 이상한 치기와 낡아빠진 관념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 착각한다. 이제 나는 그래도 된다고.
합리화를 시작하면 답이 없다. 누군가 그들의 세상을 침범하고자 하면 원래 사회가 그런 거라고 세상을 방패 삼을 테니까. 대표적으로 고위 관리직과 정치인들이, 우리 주변에서는 막무가내 상사와 이상한 꼰대 의식에 사로잡힌 동료들이 그렇겠지. 언제나 ‘원래’ 그런 것이라는 건 없다. 그것 또한 우리가 만들어온 문화고, 바꿔야 할 시대적 산물이다. 내 소망이 있다면 우리 세대에서 이상한 윤리 의식과 낡아빠진 관념의 고리를 끊어내었으면 좋겠다.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가 조금 더 합리적인 세상과 마주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