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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May 15. 2024

음악이 완성되는 지점

오늘은 무려 열흘 만에 피아노 레슨을 받는 날이다. 지난주는 매일매일 네 명의 아이를 번갈아 어딘가로 데리고 다니느라 바빴고 딱 한 번 30분 연습이 다였다. 이번 주라고 별반 다르지 않아서 어제 겨우겨우 짬을 내어 한 시간 정도 연습할 수 있었다. 


쇼팽 녹턴 48-1을 치기 시작한 것은 작년 늦가을 무렵. 쇼팽의 그 많은 녹턴 중에서 꼭 쳐 보고 싶던 곡이었고 만약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이 곡으로 하고 싶었다. 앞부분의 서정적인 도입을 거쳐 성가대의 코러스 같이 잔잔한 진행을 지나서 옥타브로 상승하고 하강하는 부분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마지막 도피오 부분은 늘 난감해서 어찌 접근해야 좋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악보를 읽는 것 자체도 힘들었다. 하지만 악보를 읽기 힘들어야 조금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겠다는 도전 의식도 생겼다. 


곡을 치면서 악보를 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손가락에 힘을 빼는 것, 땅 때리는 소리가 아닌 깊이 있는 소리를 내는 방법, 나는 레가토를 표현하는 방법, 업 다운을 넣어 밋밋한 곡에 다이내믹한 입체감을 표현하는 방법, 그리고 윗 소리를 내며 곡의 큰 줄기를 표현하는 방법 외 수많은 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웠으나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은 어려웠고,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지난번 레슨에서는 좌절했다. 손가락에 힘을 빼서 내성을 줄이려고 하니 소리는 제대로 나지도 않고 성의 없이 느껴지는 연주가 되는 것이다.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선생님은 특단의 조치를 내리셨다. 한 음 치고 힘 빼고 한 음 치고 힘 빼는 연습을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마지막 연습 때 제 속도로 가 보라고 하셨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소리와 손의 형태를 잡아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비웠다. 마음은 75로 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40으로 잡아서 56까지만 올렸다. 


드디어 오늘. "선생님, 그냥 제 마음 가는 대로 쳐 볼게요."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다 하고 싶은데 힘 빼다 보면 어찌 될지 모르겠어서 일단 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정도 나름의 줄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도 동의하시고 마지막으로 다듬어 보자고 하셨다. 


그동안 네 번째 마지막 부분에 집중했다면 오늘은 첫 번째와 세 번째 부분을 조금 더 보았다. 오늘 수업에서 나는 레가토를 알았다. 단순히 음만 떨어지지 않게 잇는 것이 레가토가 아니라 손가락 근육 전체를 사용해서 힘을 빼고 울림이 있는 하나의 선을 만드는 것. 위로 움직이지 않고 옆으로 움직이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것까지. 


그리고 홀에서 영상을 찍어 보기로 했다. 홀에 있는 야마하 그랜드는 레코딩 룸에 있는 가와이와는 음색도 타건의 느낌도 달라서 적응하는데 조금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냥 찍었다. 다른 분들도 계셔서 조금 더 집중력도 약해지고 아무래도 긴장이 되었지만 그냥 주욱 진행했다. 틀린 부분도 있고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부분 놓치고 나서 아차! 하는 것도 역시 많았다. 그래도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한계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담았다고 생각한다. 몇 년 간 잘 넣어두고 나중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오늘 레슨에서 선생님이 시작 부분에서 해 주신 이야기가 있다. 악보를 어느 정도 읽고 나면 그다음에는 손가락에 집중하게 되고 그러면 곡을 표현하고 싶어 표현력에 집중하게 된다고. 그런데 동시에 안 되니 그 두 가지를 서로 오가다가 어느 순간 음악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고. 그때 내가 표현하려는 음악이 만들어진다고 하셨다. 


연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없어서 '지금 내가 뭐 하는 짓인지'하는 자괴감까지 느껴지는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레슨을 받는 비용으로 아이들을 위해서 뭔가 더 좋은 것을 해 줄 수 있을 텐데, 연습하러 오는 이 시간에 차라리 집에서 아이들과 다른 것을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안 든 적이 없다. 나는 왜 음악을 하고 싶은 걸까. 왜 피아노를 치는 걸까. 한 곡을 마치면 끝이 아니다. 이미 또 다른 과제곡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나에게 피아노를 치라고, 연습하라고 한 적도 없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어려움에 스스로 부딪혀가면서 할 의미가 있을까. 왜 나는 피아노를 치는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 좋아서. 그럴싸한 다른 근사한 이유들이 수도 없이 생각이 났으나 진짜 이유는 단순 명료하다. 좋아서. 피아노가 너무 좋아서. 손끝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그 음악을 간절히 따라간다. 20대처럼 매일매일 몇 시간씩 연습은 불가능하다.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 앞에 앉는 것조차 호사일 때도 많다. 그래도 한쪽에 잘 간직하고 있어야지. 반짝반짝 작은 설렘을 한 켠에 두고 조금씩 계속 이어간다. 꺼지지 않고 그 빛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서툴러도 이렇게 만들어진다. 완벽한 완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 순간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만들어 놓는다. 과하게 욕심 내지 않고 할 수 있는 곳까지 했으니 지금은 그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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