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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un 18. 2024

다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한 청년의 편지

로이스 로리의 소설, 별을 헤아리며 Number the Stars를 슬로우 리딩으로 다 읽었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눈물이 나서 같이 공부하는 스텔라 작가님과 둘이 눈이 빨개지고 코가 시큰거려서 억지로 참고 꾹 읽었다. 보통 책을 읽고 뒷부분 작가의 말은 생략하기도 하는데 오늘은 함께 보았다.


사실에 기반한 이 이야기의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인가. 저자는 일련의 다른 사건들은 다 진실이라고 한다. 다만 안네마리의 가족이나 피터 닐슨, 로젠 가족 같은 주인공들은 당 시대를 대표하는 허구의 인물들이다. 당시 덴마크에 있던 7000여 명의 유대인들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 스웨덴으로 대피시켰다고 한다. 정말로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덴마크인들의 도움이 없이는 이렇게 대규모로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들의 후각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던 손수건도 진짜라고 한다. 토끼 피와 코카인을 섞어서 만들었는데, 토끼 피로 개들을 유인하고 코카인으로 후각을 마비시켜서 배에 숨은 유대인들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책의 후기 부분에는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만든 킴 말테 브룬(Kim Malthe Bruun)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치에 체포되었을 때 나이 겨우 21세. 형형한 눈빛의 모습은 나 역시도 사로잡는다. 곧은 시선의 모습이 너무 예쁘고 강렬해서 순간적으로 여자인가 싶었는데 남자청년이었다. 그는 죽기 전날 밤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그리고 모두가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전쟁 전의 시대로 여러분들이 돌아가기를 꿈꾸지 않기 말입니다. 다만 모두를 위한, 노소를 무론하고, 협소한 마음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상을 창조해 가야 할 것을 꿈꾸십시오.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조국이 갈망하는 위대한 선물이고 작은 농부 소년 한 명 한 명이 바라는 것이며 스스로 만들어가고 쟁취해서 얻어낸 것의 일부라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And I want you all to remember - that you must not dream yourselves back to the times before the war, but the dream for you all, young and old, must be toe create an ideal of human decency, and not a narrow-minded and prejudiced one. That is the great gift our country hungers for, something every little peasant boy can look forward to, and with pleasure feel he is a part of - something he can work and fight for.


그래서 저자는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맺는다. 인간의 존엄성이 있는 세계라는 은혜야말로 모든 나라가 여전히 갈망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러한 세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 이야기를 통해 상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Surely that gift - the gift of a world of human decency - is the one that all countries hunger for still. 

인간 존엄성이 있는 세계라는 은혜는 여전히 모든 나라들이 갈망하는 선물임이 당연하다.


시대와 나라와 모든 배경은 다르지만 이 편지는 내게 4.19 혁명 당시 한성여중 진영숙의 편지를 상기시켰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에 싸우겠습니다.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매우 비통하게 여기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기뻐해 주세요.



아이들과 함께 사회 공부를 하는 1학기가 되면 나는 이 편지를 아이들과 함께 읽고 함께 눈물을 흘린다. 매년 이 편지를 다루지만 그렇다고 익숙해 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아픔과 고통의 시기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시간을 겪어 왔다. 이 괴로운 시기를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에게 동일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가끔 삶이 힘들고 몰아치는 일이 있을 때 생각한다. 삼십 년 전, 이십 년 전, 십 년 전으로 그렇게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나는 어떨까. 그게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것일까. 수많은 후회의 나날과 잘못된 선택이라고 여겨지는 것들.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 여겨지는 수많은 갈림길들. 아니.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한 선택을 후회하고 아쉬워하고 자책하는 일이 있을지언정 그로 인한 결과를 되돌리고는 싶지 않다. 그 과정에서 단단해지는 나를 보았고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된 나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킴 말테 브룬도 이와 같은 편지를 썼던 것이리라. 아픔과 고통과 잔혹함을 몰랐던 그 시기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를 꿈꾸지 말라고. 다만 같이 만들어 가자고. 그렇게 우리는 또 함께 만들어 가고자 노력한다. 진영숙 열사의 어머니는 기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딸이 죽었는데 민족의 해방이 무슨 소용이랴마는 어머니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찢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날 길에 나선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다. 길에 선 이들은, 이렇게 굴복하며 외면하며 사느니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기꺼이 나의 생명과 젊음과 시간을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 hunger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wish도 hope도 dream도 아닌 hunger. 간절한 열망. 여전히 우리는 간절하게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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