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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울 Jul 05. 2024

내 아이가 가해자일까 봐

오후에 막둥이 친구 엄마에게서 톡이 왔다. 시간 될 때 전화 좀 하자는 말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바로 전화를 걸었다. 나처럼 네 아이를 키우는 그녀는 착하고 솔직하고 다부진 여성이다. 보통은 이런 일로 전화를 하지 않는다는 그녀는 고민 끝에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고 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ㅈㅎ이가 치지 않았는데 막둥이는 ㅈㅎ이가 자기를 뒤에서 쳤다고 자꾸 이야기를 해서 속상했고 또 차에서 내릴 때 방해를 하고 내리지 않아서 화가 났다고 했다. 또 경기 중에 정강이를 발로 차고 본인도 잘 못하면서 실수를 할 때는 비웃고 놀린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축구를 다녀오면 보통 기분이 좋은데 아주 나빠서 왔다는 것이다.


나는 매우 놀랐고 일단 사과를 했다. 막둥이가 축구에 가면 친구들이 자기를 놀리고 비웃어서 속상하다고 말한 것은 기억을 하고 있었다. 직장에 있고 오늘은 동문회 회식이 있는 날이라 아이와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은 밤이 되어야 가능한데 나는 이 사안을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퇴근을 빨리하는 신랑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고 어찌 된 사유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또 같이 있었던 다른 친구 엄마에게도 전화를 걸었는데 이런 부분을 물으니 비슷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마음이 불안했다. 요새 집중력을 키워주는 약의 복용량을 조금 늘렸는데 그 탓일까? 그래서 몸이 예민해져서 감당이 안 되는 것일까? 약의 기운이 떨어지고 나니 억눌렀던 기운들이 이렇게 나와서 아이가 폭력적이고 예민해진 것일까? 온갖 생각이 들면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회식 중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는 중에 ㅈㅎ이 엄마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다시 물어보니 정강이를 찬 것은 다른 아이였다고 사이좋게 잘 지내고 이해하라고 타일렀다고, 자기도 제대로 잘 알아보지 않고 이야기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신랑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오히려 놀림을 당했지 먼저 놀리거나 때린 것은 없다는 말이었다. 회식이 끝나자마자 막둥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랑이 알아보는 것은 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하나씩 물어보니 퍼즐이 맞춰졌다. 


축구에서 돌아오는 차량을 탑승할 때 막둥이는 앞 좌석에 앉았는데 뒷좌석에 앉은 친구들이 발로 의자를 찼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지 말라고 했는데 안 찼다는 대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은 분명히 발로 찼기 때문에 운전해 주시는 코치님께 일렀다고 한다. (코치님이 아이들을 야단쳤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렀고 한 마디 하셨으면 기분이 나빴을 수 있다.) 그리고 내릴 때는 내려야 하는 타이밍인지 몰라서 그냥 서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발로 찼다고 아옹다옹하는 과정에서 일부러 버티고 서서 하차를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아이들 간에 옥신각신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어린이집에서부터 서로의 기질이 다르고 성향이 달랐으니 가끔씩 투닥이는 경우가 생겼다. 


일단은 때렸다는 오해가 풀려서 정말로 너무나 다행이었다. 나는 여차하면 아이를 데리고 친구들 집으로 올라가서 정중하게 사과를 시킬 계획이었다. 특히나 아무리 경기 중이라고 해도 정강이를 일부러 발로 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잘 못하는 것을 두고 비웃는 것도 해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막둥이에게는 친구들이 안 그랬다고 하면 일단은 알겠다고 하고 우기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다. 막둥이에게도 독특한 고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우기기 시작하면 일이 명쾌하게 해결될 때까지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이런 일을 앞으로 방지하기 위해서 앞으로는 그냥 뒷좌석에 앉으라고 했더니 그건 또 싫단다. 일단 덥기도 하고 자꾸 아이들이 말을 걸어서 조용히 쉬면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땐 그냥 내가 차로 데려오는 것이 나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나는 그냥 아이에게 부탁을 했다. 서로 마음 상하는 일이 반복될 수 있으니 그냥 잠시지만 꾹 참고 뒷좌석에 타고 오라고 말이다. 어쩌면 나는 내 아이의 마음보다 이웃과의 관계를 우선하는 엄마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아이에게 이렇게 신신당부를 하는 것은 조금은 더 융통성을 발휘해서 싫더라도 한 번은 참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고 상황을 눈치 있게 파악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이 이 아이에게는 좀 절실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졸이며 있던 내내의 긴장이 우리 막둥이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스르르 풀어져 내리면서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저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아, 정말로 아이 키우기 참 힘들다." 나는 지금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은데 어쩌다 아이를 넷이나 낳아서 이리 동동 저리 동동하는 것일까 싶어서 스스로에게 또 기가 막히기도 했다. 그런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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