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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글나눔 Oct 30. 2021

늦어도 도착만 하면 괜찮아

잠깐 주저앉은 이들을 위한 위로 

서예를 시작한 후 꾸준히 응모하고 있는 공모전이 있다. 입상으로 받는 점수가 15점이 되면 초대작가로 이름을 올릴 수 있으니 대상은 7점, 우수상은 5점, 특선은 3점, 입선은 1점이다. 특선, 우수상, 대상을 차례로 거쳐 3년 만에 공모전을 마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처음 붓을 잡고 줄긋기부터 시작한 일반인이 노릴 수 있는 코스는 아니다.      

큰 욕심 내지 않고 가을만 되면 숙제처럼 작품을 완성해서 제출했다. 그렇게 특선과 입선으로 차곡차곡 점수를 쌓았고, 완성에 최소 한 달은 걸리기에 다른 일로 바쁜 해는 제출을 못하기도 했다. 결국 올해로 붓을 든지 10년 만에 초대작가까지 단 1점을 남겨두고 마지막 작품을 준비 중이다. 설마 입선이 안 되진 않겠지. 드디어 졸업하겠다. 그리고 3년이 걸렸든 10년이 걸렸든 결국 초대작가인 건 똑같다. 


혹시 길을 가다 장애를 만나 발목을 잡혀 천리를 가지 못하고 열흘을 놓쳤다면, 앞에서 놓쳤다고 하여 마침내 뒤에서 멈춰서서는 안 된다네. 당장 길에 올라 열흘에 천리를 가고 백일에 만리를 가면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똑같은 것이네.      
其或路魔絆紲, 不千里而失十日, 則不可以旣失於前, 遂止於後
卽日登道, 十日而千里,百日而萬里, 及其至一也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송사집(松沙集)』 권20 「잡저(雜著)」 <증박효경(贈朴孝卿)>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똑같다(及其至一也)”      


이 글은 기우만 선생께서 병으로 젊은 시절 책을 손에서 놓고 지낼 수 밖에 없었던 후배를 격려하는 마음으로 써 준 글의 일부이다. 십여 년을 병으로 고생하다가 이제야 좀 나아졌지만 이미 흘러가 버린 세월이 야속하고, 뒤늦게 하는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 그에게 선생은 먼길 가는 사람이 길에 오르듯 지금 당장 시작하라고 격려해 준다.      


“지금 바로 길에 오르지 않고 주저한다면, 《시경(詩經)》에서 말하는 ‘길을 가지 않고 도모하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길에 도달하지 못한다(如匪行邁謀 是用不得于道).’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젠 늦어서 소용없을 것이다, 남들은 벌써 앞서갔는데 나는 지금까지 이룬 것이 없다 하면서 방구석에 앉아 신세한탄 할 시간에 당장 무엇이든 시작하라. 그렇게 일단 길에 올라 열흘에 천 리를 가고 백일에 만 리를 가듯 꾸준히 실천한다면 성취하게 되는 것은 시기만 다를 뿐이지 똑같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글을 《중용(中庸)》에서도 볼 수 있다. 


혹은 태어나면서 이것(五倫)을 알고, 혹은 배워서 이것을 알고, 혹은 애를 써서 알지만, 그 아는 데에 미쳐서는 똑같습니다. 혹은 편안히 이것을 행하고, 혹 이롭게 여겨서 행하고, 혹 억지로 힘써서 이것을 행하지만, 그 공을 이루는 데에 미쳐서는 똑같습니다.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동양고전종합DB]


비록 각자의 자질이 다르기에 각기 다른 과정을 거치더라도 결국 앎에 이르고 성공에 이르게 되면 모두 똑같은 것이라고 말해 준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도 하지만 그건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의 위로이지 누구나 좋은 결과를 먼저 바라지 않을까. 목표를 향해 가는 중에 어려움을 만나 주저앉은 사람에게 과정이 중요하다는 위로는 잠시 미뤄두고 어서 다시 힘을 내 일어나 가 보라며 등을 밀어주는 이 말을 해 주고싶다. 특히 코로나 블루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당장 길에 올라. 조금 늦었더라도 도착만 하면 다 똑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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