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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글나눔 Oct 10. 2021

형님의 통 큰 양보

효령대군의 청권사

유교 경전에 언급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특히 공자님의 평가로 유명세를 탄 분들이 있다.


1.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 - 백이와 숙제  

子曰 不降其志하며 不辱其身은 伯夷叔齊與인저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 자는 백이와 숙제이다.” 《논어》 미자(微子)

백이와 숙제는 작은 나라 고죽군의 형제였다.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로도 유명한 은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정벌하기 위해 제후국인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들고 일어섰다. 이때 이 형제들은 신하 나라인 주나라가 어찌 감히 어버이 나라인 은나라를 정벌할 수 있나며 따지다가 여의치 않자 수양산에 들어가 죽음으로써 군주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승자의 역사인지라 주 무왕(周 武王)의 정벌은 합리화 되었지만 그래도 두 형제가 절개를 지킨 일 만은 오래도록 칭송을 받았다.


2.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 유하혜

謂柳下惠少連하시되 降志辱身矣나 言中倫하며 行中慮하니 其斯而已矣니라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였으나, 말이 윤리에 맞으며 행실이 사려(思慮)에 맞았으니, 이런 점일 뿐이다.”《논어》 미자(微子)

유하혜는 노나라의 관리였는데 임금의 자질을 따지지 않고 부르는대로 가서 어떤 관직이든 받았다. 겉으로 볼 때는 절개를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한 것 처럼 보이지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항상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여 자기 본분을 다 하였다.


3. 미련을 버리고 훨훨 떠나자 - 태백과 우중(중옹)

謂虞仲夷逸하사되 隱居放言하니 身中淸이며 廢中權이니라  “숨어살면서 함부로 말 하였으니, 몸은 깨끗함에 맞았고 폐하여 벼슬하지 않음은 권도(權道)에 맞았다." 《논어》 미자(微子)

주(周)나라 태왕(太王)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천자국인 은나라에 망조가 들자 큰 제후국이었던 주나라의 역할이 커졌는데 태왕의 둘째 아들 우중(중옹)이 생각하기에 큰 형 태백과 자신 보다는 막내 동생과 그 조카가 이 일의 적임자로 보였다. 아버지의 뜻도 그러하신 듯 하니 큰 형과 상의하여 둘 다 왕위를 포기하고 멀리 남쪽으로 떠났고, 동생과 조카는 이들의 바람대로 주나라의 훌륭한 임금인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되었다.


많은 역사서를 통해 우리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양하게 처신한 많은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상황에 따라 무조건 절개를 지키는 것이 옳은 것도 아니고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 항상 현명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기도 하니 과거의 일은 현재의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거울이 될 때도 있다.


우리나라에도 형제에게 왕위를 양보한 일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분들이 있다. 바로 태종 이방원의 아들로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양보한 큰형 양녕대군과 작은형 효령대군. 형님들의 통 큰 양보로 적장자가 아닌 셋째 아들이 왕위를 물려 받은 상황은 먼 옛날 주나라 형제들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너무나 딱 들어맞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양보를 해야 했던 형님들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야사에 의하면 두 형님께서 아우의 영특함을 보고 양녕대군은 일부러 미친 사람 노릇을 하고, 효령대군은 불가에 몸을 의탁했다고 전해지고 있긴 하다.  


弟忠寧大君生有聖德。百姓歸心。世子心知之。佯狂逃去以讓之
아우인 충녕대군(忠寧大君)은 태어나면서부터 성덕(聖德)이 있어 백성들이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세자(양녕)가 마음으로 알아차리고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도망하여 세자 자리를 양보하였다.
《기언(記言)》 지덕사기(至德祠記) 허목(許穆, 1595~1682)


讓寧之在儲位也, 默察英廟之生有聖德, 乘夜就問於臣祖曰, 吾欲托疾, 君當何爲? 孝寧無語, 但合掌以示之, 讓寧頷之。翌朝孝寧, 向壁作伽趺坐, 宮人, 走白于內, 太宗大王驚甚, 親臨問其故, 對曰, 夜夢, 如來敎臣, 是以心定矣。
양녕께서 세자의 자리에 계시는 동안 영묘(英廟 세종대왕)께서 타고난 성덕(聖德)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고는 밤을 타 신의 선조(효령대군)에게 가서 물어보기를 ‘내가 병을 칭탁하고자 하니, 자네는 어찌하겠는가?’ 하시자, 효령대군께서는 아무 말 없이 단지 합장(合掌)하는 것으로 뜻을 내보이시니, 양녕대군께서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효령대군께서 벽을 향해 가부좌(跏趺坐)하시자, 궁인이 대내(大內)로 달려가 아뢰었습니다.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 몹시 놀라 친림하여 그 까닭을 물어보셨는데, 효령대군께서 대답하기를 ‘어젯밤 꿈에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신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니, 이 때문에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하셨습니다.《승정원일기》 영조 12년 5월 25일 기사


형님들의 뜻을 이어 받은 충녕대군은 역사에 길이 남는 성군이 되셨지만 격무에 시달리신 탓인지 안타깝게도 두 형님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고, 오히려 두 대군은 왕실의 큰 어른으로 존경받으며 더 오래 살아계셨던 것을 보면 인생은 역시 길게 봐야 하는구나 싶다.


양녕대군은 돌아가신 후 숙종 때에 지덕사(至德祠)라는 사당과 이름을 하사받았는데, 효령대군은 묘소만 있었던터라 영조 때가 되서야 후손들이 효령대군의 사당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청권(淸權)' 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당 건물을 올렸고 사액(賜額)은 정조 때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전 현감 이중태가 양녕 대군과 함께 효령 대군도 사우에 포함시키자고 청하다
《영조실록》 12년(1736년) 4월 18일 기사


청권사(淸權祠)에 편액을 하사하는 날에 치제한 글
...
주 나라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의 덕을 / 有周泰雍
백성들이 이름하여 말할 수 없었는데 / 民無能名
천백 년이 지난 후에 / 後千百年
우리 왕가에 효령(孝寧)과 양녕(讓寧) 두 대군이 계셨네 / 我家二寧
...
홍재전서》정조(正祖)


청권사(淸權祠)에서 () () 공자께서 우중(중옹)평가하셨던 '隱居放言하니 身中이며 廢中이니라.' 라는 부분에서 유래되었다.


왕위를 양보한 우중은 야만족의 땅으로 가서  지역의 풍습대로 머리를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여(斷髮文身단발문신) 왕위에 뜻이 없음을 몸소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철저하게 숨어살며(은거隱居) 왕위를 탐하지 않은 모습에 맑을 () 붙인 것이고, 말을 함부로 하여(放言방언) 스스로 폐위한 것은 권도(權道, 사리에 맞는 임기응변)이기에 저울질 한다는 뜻의 () 붙인 것이다.

 

효령대군은 야만족의 나라로 가지 않고도 왕위를 탐내지 않았고(淸), 불가에 귀의한 척 하여 스스로 폐위하였으니(權) 주나라 둘째에 비하여 결코 그 행적이 뒤떨어지지 않기에 그의 사당에 청권(淸權)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주나라의 우중이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효령대군은 종친으로 대우받으며 행복하게 91세까지 장수하셨다. 조선이 건국 된지 얼마 되지 않은 태조 4년(1395년)에 태어나 성종 17년(1486년)에 돌아가셨으니 무려 9명의 임금(태정태세문단세예성)을 겪은 조선 초기 역사의 산 증인 같은 분이시다. 중간 중간 재위가 짧은 임금들이 계시기 때문에 마지막 임금인 성종은 효령대군의 증손자뻘이 된다.


효령대군이 방배동 청권사(淸權祠)에서 대대로 제사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 생애가 그리 맑지(淸)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죽음에 대한《성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역시 조선의 사관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보(효령대군의 이름)는 밖으로 청렴한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사실 탐욕(貪慾)하여서 거짓 문계(文契,문서)를 만들어 남의 노비[臧獲]를 빼앗은 것이 매우 많았는데,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여러 아들들이 재산을 다투어 화목(和睦)하지 못하였다.補外似廉靜, 而內實貪欲, 僞爲文契, 奪人臧獲甚多。身沒未幾, 諸子爭財不睦。《성종실록》 17년 5월 11일 기사

이름에 걸맞게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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