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正命)'인가, '자작얼(自作孼)'인가
무려 '송추가마골'에서 갈비를 먹기로 한 날이었다. 그 명성을 익히 들어왔고, 선물용으로 그곳의 갈비세트를 산 적은 있었지만 직접 먹어본 적은 없는 고급 갈빗집이다. 마침 참여했던 행사가 잘 끝난 기념으로 여기서 갈비를 사주신다기에 몇 주 전부터 일정에 넣어놓고 기다려온 참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에 눈을 떠서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들었는데 반갑지 않은 헤드라인이 떠있다.
“서울역서 칼부림 협박글… 경찰, 작성자 추적”
왜 하필 내가 서울역에 가야 하는 오늘인가! 왜 오늘이냐고 탓할 것도 없이 애초에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만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는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슬프게도 우리는 이미 겪어보았다. 발생할 확률이 0.00001%라고 하더라도 나에게 벌어지면 100%.
갈비만 포기하면 0.00001%라 할지라도 결코 0은 아닌 확률을 확실히 0으로 만들어서 위험에 대한 걱정을 완벽히 떨쳐낼 수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인 갈비정식을 위해, 불확실하지만 치명적인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가. 고민 끝에 이러한 비사회적 존재의 무가치한 도발에 나의 소중한 일상이 영향을 받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비분강개한 마음이 일어났다. (갈비가 뭐라고...)
사실 서울역에서 오래 머무를 것도 아니고, 기차에서 내려서 금방 전철역으로 빠져나갈 거라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 확률은 극히 낮을 것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지나친 상상력이 발목을 잡는다. 일단 나가기로 마음을 먹은 후 그래도 최대한 할 수 있는 준비는 후회 없이 해보자는 생각에 창고를 뒤졌다. 찾아낸 것은 해외여행을 대비해 사두었던 방검가방. 커터칼 정도에는 잘려나가지는 않는 천으로 만들어진 소매치기 방지용 가방이다. 칼부림을 예고한 사람이 작은 커터칼을 들고 나올리는 없지만 아쉽게도 집에 큰 칼을 막아주는 가방은 없는지라 약소하지만 이거라도 들어본다. 여차하면 가방으로 막아보겠다는 상상이지만, 사실 운동선수도 아닌 다음에야 급박한 순간에 몸이 제대로 움직이기나 할지 모르겠다. 이성적으로는 부질없다는 것을 알지만 때로 감정은 이성과 관계없이 작동하는 법. 실용적인 목적보다는 그저 문밖을 나서는데 필요한 심리적 안정을 위한 조치일 뿐인걸 나도 잘 안다.
한문 글귀 중에 “자작얼(自作孼)”이란 말이 있다. 원래는 『서경』에 나오지만 『맹자』에서도 인용한 유명한 구절이다.
天作孼은 猶可違어니와 自作孼은 不可活이라
하늘이 지은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지은 재앙은 살 길이 없다.
『맹자 공손추 상』
비슷한 말로 제 명에 죽고 싶으면 쓸데없이 위험한 일은 벌이지 말라는 말도 있다.
知命者,不立乎巖牆之下
정명(正命)을 아는 자는 위험한 담장 아래에 서지 않는다.
『맹자 진심 상』
정명(正命)은 하늘의 도리를 따라 살면서 하늘이 내린 수명을 다 하고 죽는 것을 말한다.
‘자작얼’과 비슷하게 쓰이는 요즘 말에 “누가 칼 들고 협박함? (a.k.a 누칼협?)”이 있다. 두 가지가 비슷한 듯 하지만 어조는 좀 다르다. ‘자작얼’은 일단 자신이 벌인 일이 이치를 벗어났을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순리대로 하지 않고 바른 길을 가지 않음으로 인해 뒤따르는 안 좋은 결과에 대한 책망에 가깝다. 그에 비하면 ‘누칼협’에는 본인이 좋아서 한 일이라면 불평하지 말고 불만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가 더 있는 것 같다. 박봉과 민원에 시달리는 공무원의 신세한탄에 누가 공무원하라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왜 징징거리냐고 핀잔을 줄 때 쓰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일이 이치를 벗어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만일 나의 서울역행에 불행이 뒤따른다면 이는 정명(正命)일까, 아니면 자작얼(自作孼)일까? 내가 나쁜 일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보상을 정당히 받기 위해서라면 이는 자작얼이 아닌 정명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갈비가 뭐라고...)
서울역에 도착해 보니 걱정이 무색하게 사람들로 북적였다. 물론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도발로 치부하시는 분들이 대다수였겠지만, 혹시 나처럼 걱정하는 와중에 용기를 내어 나오신 분들도 계셨다면 그 용기에 작게나마 박수를 보낸다. 협박을 그저 장난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역무원분들과 경찰분들은 모두 방검복을 입고 순찰 중이셨다. 승객들이야 잠깐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하루종일 계셔야 하는 분들께는 안 좋은 일이 절대 일어나질 않길 바라며 서울역을 떠났다.
나를 시험에 들게 했던 갈비는 안 왔으면 후회할 만큼 입에서 살살 녹는 훌륭한 맛이었다. 되지도 않는 나쁜 글을 올린 사람은 당일 서울역은커녕 집을 나서지도 않았고 결국 집에서 체포되어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집에 오는 도중에 남편을 만나 같이 걸어왔다. 집을 나서기 전 괜한 걱정을 했던 것이 조금 부끄러워져서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눈 밝은 남편이 대번 묻는다.
“오늘 그래서 방검가방 들고나간 거야?”
역시 예리하군. 놀림받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을 신경 쓰고 불안해할 법한 내 성정을 이미 익히 알아서인지 외려 잘했다고 말해줘서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