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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글나눔 Sep 21. 2021

천년의 스테디셀러

<은중경(恩重經)>을 통해 전하는 효심(孝心)

오랜만에 공연을 보러 들린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심상치 않은 옛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명을 보니 무려 단원 김홍도. 흔히 알려져 있는 편안한 민화가 아니라 출판을 위해 정식으로 힘주어 그린 느낌이 난다.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작품명을 보니 부모님의 은혜가 무겁다는 뜻으로 대략짐작이 간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속세를 떠나 출가를 하기에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근본없는 종교라며 선비들의 구박을 받았던 불교의 경전이 단원 김홍도의 손으로 이렇게나 심혈을 기울여 제작되었다고? 궁금한 마음을 잠시 접고 공연을 즐겁게 감상한 뒤 집에 돌아와 바삐 손가락을 놀려보았다. 


이 작품의 전체 이름은 《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이고, 여기 있는 그림은 경문 중 일부를 알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 변상도(變相圖)다. 게다가 정조(正祖)께서 직접 이 경문 전체를 판각하여 배포하도록 하였으니 많은 감동을 받았던 모양이다. 정조임금의 글을 모아 둔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도 불교의 경문이라 일찍 접하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이 유교의 효(孝)사상과도 딱 들어맞으니 널리 알리고자 한다는 <은중경>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다. 


불승(佛乘 부처의 교법)에 대해서는 일찍이 어두운 바였다. 그런데 《대보부모은중경(大報父母恩重經)》은 게송(偈頌)으로 깨우침이 절실하고 간절하여 중생(衆生)을 손잡고 인도하여 극락(極樂)에 오르도록 하니, 우리 유교의 조상의 은혜를 갚으며 인륜을 돈독하게 하는 취지와 부절처럼 들어맞는다. 그것을 어찌 섣달 그믐날이나 단옷날 서운관(書雲觀)에서 찍어 주는 재앙을 물리치게 하는 부적(符籍)에다 견줄 수 있겠는가. 지금부터는 섣달 그믐과 단오 두 명절에 이 게송을 대신 붙이도록 하고 그 인본(印本)을 두루 내려 주게 하였다.《홍재전서(弘齋全書)》제56권 


어머니의 회갑을 맞이하여 효성스러운 임금의 명으로 당시 도화서 화원이었던 천재화가 김홍도가 판화의 밑그림을 그렸으니 그 완성도는 말할 것이 없을 터.  이 <은중경>은 정조의 명으로 처음 새겨진 것이 아니라 이미 고려 초기 부터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어 유통되어 왔다고 한다. 부모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마음에 더하여 자신의 복을 바라는 기복적 신앙의 차원으로 개인이 시주하여 제작되기도 했고 한문 뿐 아니라 언해본도 많이 유통이 되었다. 어떤 내용이었길래 오랜 시간 동안 임금 뿐 아니라 백성들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는지 소극장에 걸린 판화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보았다. 


이 판화는 정조의 명으로 판각한 뒤 화성의 용주사(龍珠寺)에 보관되어 있는 목판으로 제작한 것인데 <은중경> 전체 에서 정종분(正宗分) 중 여래정례(如來頂禮) 1장면, 십게찬송(十偈讚頌) 10장면, 원유팔종(援喩八種)  중 주요수미(周遶須彌) 1장면으로 총 12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한글 해설은 당시 백성들이 읽었을 것을 상상하며 언해본[송광사본]을 참고하여 풀어보았다. 


제1도 여래정례(如來頂禮) 

제1도 여래정례(如來頂禮)

爾時에 世尊이 將領大衆하사 往詣南行하사 見一堆枯骨하시고 爾時에 如來ㅣ 五體投地하사 禮拜枯骨하시니라..(중략).. 此一堆枯骨은 或是我前世翁祖어나 累世爺孃이라 吾今禮拜이니라

이 때에 세존께서 대중을 거느리시고 남쪽으로 나아가시다가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보시고, 이 때에 여래께서 오체투지를 하시며 마른 뼈에 예를 갖추어 절을 하셨다. ..(중략)..."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는 혹 나의 전생의 조상님이시거나, 누세의 부모님의 뼈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예를 갖추어 절하는 것이다."







제2도 懷耽守護恩(회탐수호은) 품어서 지키고 보호해 주신 은혜 

제2도 懷耽守護恩(회탐수호은)

累劫因緣重(누겁인연중)    

여러 겁의 인연이 중하니 

今來託母胎(금래탁모태)    

이제와 어머니의 배에 들어오다 

月逾生五臟(월유생오장)    

달이 넘으니 오장이 생겨나고

七七六精開(칠칠육정개)    

일곱 달이 되니 여섯 가지 정이 열리는도다 

體重女山岳(체중여산악)    

몸이 무거워 산과 같고 

動止㤼風災(동지겁풍재)    

다닐 때 바람을 두려워하는도다  

羅衣都不掛(나의도불괘)    

비단옷을 입지 않으니 

裝鏡惹塵埃(장경야진애)    

거울에는 먼지가 끼어있도다 



제3도 臨産受苦恩(임산수고은) 해산달이 다 되어 수고하는 은혜

제3도 臨産受苦恩(임산수고은)

懷經十箇月(회경십개월)    

아이를 가진지 열 달 지나

産難欲將臨(산난욕장림)    

해산의 어려움이 다가오도다 

朝朝如重病(조조여중병)   

아침마다 무거운 병에 걸린 듯 하고 

日日似惛沈(일일사혼침)    

날마다 정신이 흐릿하고 기운을 잃은 듯 하도다 

煌怖難成記(황포난성기)    

두려움을 이루말할 수 없으며 

愁淚滿胸襟(수루만흉금)    

눈물이 가슴에 가득하였도다 

含悲告親族(함비고친족)    

서러운 마음을 머금고 친족들에게 말하기를

猶懼死來侵(유구사래침)    

오직 죽음이 올까 두렵다 하노라 



제4도 生者忘憂恩(생자망우은) 자식을 낳으니 시름을 잊은 은혜

제4도 生者忘憂恩(생자망우은)

慈母生君日(자모생군일)  

어머니께서 그대를 낳은 날

五臟總開張(오장총개장)  

오장이 모두 열렸도다

心身俱悶絶(심신구민절)  

몸과 마음이 모두 기절하고 

流血似屠羊(유열사도양)  

피를 흘림이 양을 잡은 듯 하도다

生已聞兒健(생이문아건)  

낳은 아이 건강하다고 하니 

歡喜倍加常(환희배가상)  

기쁨이 더욱 배가 되도다 

喜定悲還至(희정비환지)  

기쁨이 안정되고 슬픈 마음이 다시 생기니

痛苦徹心腸(통고철심장)  

설움이 간담에 사무치도다 



제5도 咽苦吐甘恩(연고토감은) 쓴 것은 삼키시고 단 것은 뱉어 먹이시는 은혜

제5도 咽苦吐甘恩(연고토감은)

父母恩深重(부모은심중)   

부모님의 은혜가 매우 중하니 

恩憐無失時(은련무실시)   

사랑이 그지없도다 

吐甘無所食(토감무소식)   

단 것을 토하여 먹이니 드실 것이 없고 

咽苦不嚬眉(연고불빈미)   

쓴 것을 드실 때 찡그림이 없으시도다

愛重情難忍(애중정난인)   

사랑이 중하니 정을 참지 못하고

恩深復倍悲(은심부배비)   

은혜가 깊으니 다시 슬프고 설움이 더해지도다

但令孩子飽(단령해자포)   

단지 아기를 배 부르게 하시고

慈母不辭飢(자모불사기)   

어머니는 배고픔도 사양하지 않으신다 



제6도 回乾就濕恩(회건취습은) 마른 자리에 아이 누이시고 젖은 자리에 누우시는 은혜

제6도 回乾就濕恩(회건취습은)

母自身俱濕(모자신구습)     

어머니 당신은 젖은 자리 누우시고

將兒以就乾(장아이취건)     

아이는 안아서 마른 자리 뉘여놓도다

兩乳充飢渴(양유충기갈)     

두 젖으로 주리거든 먹이시고

羅袖掩風寒(나수엄풍환)     

고운 옷 소매로 찬 바람을 막아주시도다

恩憐恒廢寢(은련항폐침)     

어여쁘니 잠이 없고 

寵弄盡能歡(총롱진능환)     

귀여워하니 즐겁도다 

但令孩子穩(단령해자온)     

다만 아기를 편안하게 하고

慈母不求安(자모불구안)     

어머니께서는 편안함을 찾지 않으시도다



제7도 乳哺養育恩(유포양육은)  젖을 먹여 길러주시는 은혜

제7도 乳哺養育恩(유포양육은)

慈母象於地(자모상어지)     

자애로운 어머니 땅과 같으시고

嚴父配於天(엄부배어천)     

엄하시 아버지 하늘과 같으시다

覆載恩將等(부재은장등)    

하늘과 땅의 덮어주고 실어주는 은혜는 똑같으니

父孃意亦然(부양의역연)     

부모의 마음이 또한 그러하다 

不憎無眼目(부증무안목)     

미워하지 않으니 눈을 흘긴 적이 없고 

不嫌手足攣(불혐수족련)     

싫어하는 마음이 없으니 손발이 이어졌도다

誕腹親生子(탄복친생자)     

친한 자식을 낳으니 

終日惜兼憐(종일석겸련)     

저물도록 아끼니 가엾게 여기시도다



제8도 洗濁不淨恩(세탁부정은)  씻노라 하니 좋지 못한 은혜

제8도 洗濁不淨恩(세탁부정은)

憶昔美容質(억석미용질)   

아름답던 옛 모습

姿媚甚豊濃(자미심풍농)    

곱고 살찌셨더니 

眉分翠柳色(미분취류색)    

눈썹은 푸른 버들잎같고 

兩臉奪蓮紅(양검탈연홍)    

두 귀밑은 연꽃같더니라 

恩深摧玉貌(은심최옥모)    

자식 기르는 은혜 깊으니 고운 모습 사라지고

洗濯損盤龍(세탁손반룡)    

씻기다 보니 거울은 상해버렸도다

只爲憐男女(지위련남녀)    

다만 자식들을 사랑하노라하니 

慈母改顔容(자모개안용)    

어머니의 모습은 변하였도다 



제9도 遠行憶念恩 (원행억념은) 자식이 멀리 나갔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

제9도 遠行憶念恩 (원행억념은)

死別誠難忍(사별성난인)     

죽어서 이별함은 참으로 참지못하거니와

生離實亦傷(생리실역상)     

살아서 이별함도 또한 서럽도다

子出關山外(자출관산외)     

아들이 관문의 산 밖으로 나가니

母意在他鄕(모의재타향)     

어머니의 마음이 타향에 있도다

日夜心相逐(일야심상축)     

매일 밤 마음이 서로 쫓고 

流淚數千行(유루수천항)     

눈물은 수천 줄이 흐르도다 

如猿泣愛子(여원읍애자)     

원숭이가 새끼를 사랑함 같아 

憶念斷肝膓(억념단간장)    

걱정으로 애간장이 끊어지도다 



제10도 爲造惡業恩(위조악업은) 모진일을 만드는 은혜

父母江山重(부모강산중)     

부모의 은혜 강산같이 중하니

恩深報實難(은심보실난)     

은혜 갚음이 어렵도다 

子苦願代受(자고원대수)     

자식의 수고로운 일을 대신 받고자 하고 

兒勞母不安(아로모불안)     

아이가 힘들어 함에 어머니는 편치 못하시도다

聞道遠行去(문도원행거)     

자식이 멀리 나간다는 말 들으면

行遊夜臥寒(행유야와한)     

어머니 밤에 찬 곳에 누웠도다 

男女暫辛苦(남녀잠신고)     

자식들이 잠깐 고생하여도

長使母心酸(장사모심산)     

어머니의 마음을 오래 속상하게 하도다



제11도 究竟憐愍恩(구경연민은) 나중을 생각하고 어여삐 하시는 은혜

父母恩深重(부모은심중)  

부모님의 은혜 중하니

恩憐無失時(은련무실시)  

어여뻐함을 잃을 때가 없도다 

起坐心相逐(기좌심상축)  

앉으나 서나 마음이 서로 쫓고 

遠近意相隨(원근의상수)  

멀거나 가까우나 뜻이 서로 쫓아가도다

母年一百歲(모년일백세)  

어머니 연세 백 세가 되어도

常憂八十兒(상우팔십아)  

여든 먹은 자식을 항상 걱정하시니

欲知恩愛斷(욕지은애단)  

은혜가 그침을 알고자 하면

命盡始分離(명진시분리)  

목숨이 다 해야 나누어지리라 



제12도 周遶須彌(주요수미) 수미산을 돌다 

假使有人이 左肩擔父하고 右肩擔母하여 硏皮至骨하고 骨穿至髓히 遶須彌山하되 經百千匝이라도 猶不能報父母深恩이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메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메고 살이 패어 뼈가 드러나고 뼈가 뚫려 골수에 이르도록 수미산을 돌되 백번, 천번에 이르더라도 무보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가 없다. -원유팔종(援喩八種) 중









몸은 힘들어도 그저 돌아가시는 날까지 자식 걱정이 끊일 줄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서술한 경문은 종교를 뛰어넘고 시공간을 넘어 울림을 준다. 역시 수백년을 이어온 스테디셀러답다.


또 명절이 돌아왔다. 마른 뼈를 보고 절하는 여래의 심정으로 나의 유전자 속에 남아있는 선조들을 기억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고, 나를 세상에 있게 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에도 적절한 날이다. 효도는 제사상으로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명절에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뼈가 패이도록 수미산을 돌지는 못할지언정 -성인(聖人)이 권장하는 과업의 난이도는 언제나 너무 높다-  아직 안 가보신 멋진 곳, 아직 안 드셔보신 맛있는 음식을 드실 수 있는 미식투어라도 계획하여 모시고 다녀야겠다. 


<참고자료>

송광사 본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언해 [보러가기]

문화의 뜰 2007년 제52호, 정조와 용주사 『은중경』 경판이 지닌 사연, 송일기(중앙대 교수)

佛說大報父母恩重經 變相圖의 圖像 형성 과정 - 불교경전 形像化의 한 패러다임(paradigm) , 2004, Vol.23 pp. 111 ~ 154

새로 발견된 湖南板  <父母恩重經諺解>  4종의  書誌的  硏究,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제41권  제2호)

佛說父母恩重難報經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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