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그림 따라 그리기의 재발견
딸내미가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아이가 잠들기 전까지 영겁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체력과 인내심이 모두 바닥난 우리 부부에게는 오후 8시부터 약 한두 시간이 하루 육아 중 가장 힘든 시간이다.
딸내미는 평소와 달리 좋아하는 TV프로그램 '고고 다이노'를 보여 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유튜브에서 '우주 동요'를 보여 달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대신 지난 주말 아들내미의 백일잔치 때 고모부가 선물해 주신 미술 도구 세트를 식탁 위에 펼쳐 두고 신나게 그림을 그렸다. 어찌나 그림을 신나게 그리던지, 나도 함께 그리고 싶어 큰 도화지 두 장을 들고 와 딸내미 옆 빈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종이 한 장을 딸내미에게 내밀었다. 딸내미가 얇은 종이에 열심히 마카로 색칠을 하고 있는데, 종이가 흠뻑 젖어 구멍이 자꾸 뚫리는 게 안쓰러웠던 아빠의 마음이랄까. 아이에게 종이를 건네고 나는 종이에 무얼 그릴까 생각을 해 봤는데 오늘따라 도무지 그릴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답이 생각나지 않으면 커닝을 해야지. 옆에서 분주하게 색연필로 무언가를 그리는 딸내미 그림을 곁눈질로 보며 열심히 따라 그리다 말 그대로 딱 걸렸다.
"아빠, 내가 그리는 그림 따라 그리고 싶어?"
"응, 해솔이가 너무 멋지게 그려서 아빠가 따라 그리고 싶었어."
"좋아, 알겠어. 가르쳐 줄게 잘 따라 그려 봐."
그림을 따라 그렸다고 딸내미에게 혼날 줄 알았는데, 해솔이는 흔쾌히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기회가 닿을 때 열심히 배워야 한다는 나의 평소 신념처럼 열심히 따라 그렸다.
"아빠, 얘 눈은 한쪽은 감도록 그려야 해. 자세히 봐봐."
"아빠, 코를 그려야지, 길쭉하게 그려야 해."
"색깔은 나처럼 보라색, 연두색, 핑크색, 연보라색으로 칠해야 해. 좋아."
"이건 뭘 그린 거야? 표정이 정말 생생하네!"
"해마를 그렸구나! 저번에 수족관에서 본 해마 같다."
"해솔이 그림을 따라 그리니 아빠도 그림 그리는 게 참 쉽게 느껴지네!"
해솔이는 그림을 자기처럼 예쁘게 그리고 싶은 아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을 쏟아냈고, 나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봤을 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아이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느끼며 느끼는 감탄을 쏟아냈다. 함께 그리고 대화를 하다 보니 시간이 어느덧 잘 시간에 가까워졌다.
"해솔아 이제 그림 멋지게 완성했으니 그만 자러 갈까?"
"응, 좋아. 오늘 많이 배웠지? 내일도 알려줄게."
여느 때 같으면 잠드는 게 아쉬워 잠을 재우려는 엄마와 한바탕 실랑이를 했을 해솔이가 오늘은 쉬이 꿈나라 여행을 떠났다. 아빠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느라고 많이 피곤했는지, 아니면 내일의 특별 훈련을 위해 컨디션 관리를 하려는 건지. 그림을 그리는 내내 즐거워했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아이에게 가르치려고 애쓰던 평소 나의 모습을 반성해 볼 수 있었다. 육아는 아이를 기르면서 스스로도 돌아볼 수 있는 최고의 자기 계발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