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30분 늦게 해솔이의 어린이집을 찾았다. 평소 같으면 신발이 빼곡하게 차 있었을 신발장, 텅텅 빈 허전한 공간 사이로 해솔이의 공룡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아이들의 하원 시간은 빨라지는데, 해솔이의 하원 시간은 해가 쨍쨍한 날보다 늦었다.
"해솔아, 오래 기다렸지?"
"응, 오늘 아빠랑 어디 놀러 갈까. 담작은도서관 갈까?"
"오늘은 월요일이라 도서관 문을 열지 않는 날이야. 한창 눈이 와서 밖에서 놀기도 힘들고 어떡하지?"
"그냥 집으로 갈래."
정말 집으로 가고 싶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좋아하는 도서관에도 가지 못하고 지난주 하루도 빠짐없이 찾았던 동네 산책길을 걷지 못해서였는지…. 집으로 가자던 해솔이는 현관문을 들어서서부터 내내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오늘은 아내가 친한 동료들과의 약속이 있는 날이라 7시 이후부터는 홀로 두 아이들을 돌보기로 한 날이었다. 아내가 집을 떠나기 전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아기 띠에 해담이를 매달고 부족했던 잠을 재우느라 부산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집안 여기저기에서 해솔이의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저녁을 먹고 난 후에도 해솔이의 불평불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에휴, 도대체 누가 나랑 놀아주는 거지?"
"나도 심심한데, 누가 봐줬으면 좋겠는데."
해솔이의 불평 속에 좀처럼 집을 떠나지 못하는 아내를 보내고, 내가 해담이를 재우러 안방에 잠시 들어간 사이 해솔이는 TV로 '고고 다이노'를 봤다. 평소 같으면 TV를 보며 무시무시한 티라노사우루스 흉내를 내는 소리,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오늘따라 거실은 고요했다. 마치 경건한 다큐 프로그램을 틀어놓은 듯이. 꿈나라로 떠난 해담이 곁을 떠나 해솔이의 옆에 슬쩍 앉았는데도 멍하니 TV만 바라볼 뿐이었다.
침묵의 여왕은 TV를 다 보고 나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책장에서 그림책 세 권을 뽑아왔다. 그림책을 읽겠다는 것은 곧 자러 들어가겠다는 신호. 좋아하는 공룡 그림책을 세 권이나 뽑아 왔다. 원래는 책장 한 장 한 장 넘어가기 힘들 만큼 질문도 하고, 재미있었던 부분도 이야기하는 딸. 오늘은 어째 말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내가 세 권을 다 읽기 힘들어 두 권만 읽고 다음에 한 권을 더 읽어 주겠다며 설득하기 바쁠 텐데, 오늘 해솔이는 두 권도 채 다 읽기 전에 자러 들어가겠다며 자일리톨 캔디를 찾았다. 자일리톨 캔디는 이제 자러 들어가겠다는 신호다.
오랜만에 해솔이 곁에 누웠다. 아내가 조리원에서 나온 이후 모처럼 허락되지 않았던 해솔이의 옆자리. 오늘은 엄마의 빈자리를 대신했다(사실, 작년까지는 줄곧 나의 자리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아빠 곁에 누우니 속상했던 마음이 다시 떠올랐는지 해솔이의 무거웠던 입이 열렸다.
"오늘은 아빠가 많이 안 놀아 줘서 속상했어."
내 죄를 내가 알렷다. 출장, 도서관 휴관, 날씨, 동생 돌보기 등등 할 일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의지가 있었으면 얼마든지 놀아줄 수 있었을 텐데. 예전에는 하루종일 일하고 퇴근하고 와서도 신나게 놀아주었던 아빠가 갑자기 핑계쟁이가 되었으니 많이 속상할 수밖에.
"오늘은 아빠가 미안해. 내일은 저녁에 아빠랑 신나게 놀자."
"응, 아빠 약속했어!"
평소 같으면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 맥주 한 잔을 하며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이 시간이 더없이 행복한 시간인데 오늘따라 창밖에 잔뜩 쌓인 눈처럼 마음이 참 무겁다. 육아를 마치고 맞이하는 늦은 밤의 여유를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깨어 있는 동안 후회 없이 놀아주고, 아빠로서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내일은 여유로운 나의 여가시간을 위해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