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이라는 영화를 봤다.
패터슨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패터슨'이라는 이름을 가진 버스 운전기사다.
틈틈이 시를 쓰며 살아가는 평범한 패터슨의 일상과 그가 적은 시들이 겹치며 영화는 시작된다.
패터슨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구매하라는 사랑하는 이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냐. 내가 만약 그것을 구매한다면, 분명 그것에 노예가 될 것이 뻔해"
월요일에서 다음 주 월요일까지의 주인공 "패터슨"의 '지루한' 일주일의 루틴을 엿보는 것이 플롯인 이 영화는 현대인에게 있어 과연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나에게 던지게 했다.
주인공 패터슨은 항상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일정한 공간에서, 일정한 식사와 일정한 일을 한다.
패터슨은 만나는 인간조차 일정하다.
매일 다른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것은 모든 것이 선으로 고정된 2차원 세상 속, 가끔씩 튀어나오는 1차원적 점 같은 존재로 비친다.
패터슨은 자신의 2차원 삶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3차원적 예술인 시를 적어나간다.
예술가의 삶은 예측불허다.
영감과 의욕이 계속되지 않고, 산발적이고 가끔은 돌발적이다.
그렇기에 감정에 휘둘리기 쉽고 환경 통제와 감정의 변화에 있어 많은 변수들이 생긴다.
패터슨은 시를 쓰며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항상 자신의 감정을 추슬렀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곳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해선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웠다.
오랜 내 삶의 목표는 평온한 마음 상태의 지속이었고, 그에 대해 고민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그저 기계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은 그저 유기체일 뿐이고, 이성은 허상이라고 말한다.
지난 4월, 이 말속에서 난 허무함을 느꼈다.
그동안 가져왔던 존재의 의미와 이성에 대한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허무가 갑작스레 찾아왔듯, 그것을 이겨낼 힘도 갑작스레 찾아왔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던 중 부처에 대한 대화를 나눴고 그 순간 4월의 허무가 부처의 말을 통해 꽃을 피웠다.
2500년 전, 부처는 인간 삶과 존재의 허무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끝없는 고통 즉 고통의 바다라고 말했다. 그것을 수행으로 헤치고 나오라 말했다.
"그래, 내가 기계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럼 이 기계의 움직이게 하는 코드는 무엇일까?
이 기계의 코드는 호르몬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사실 모든 게 자신의 의지가 아닌, 정해진 매트릭스라고 깨닫지만 그 깨달음조차도 매트릭스의 일부였다.
그 매트릭스가 호르몬인 것이었다.
내가 호르몬을 지배하지 못한다면, 호르몬은 날 지배하게 된다.
나 자신과의 싸움은 곧 호르몬과 나의 싸움이다.
모든 것이 맞물려있는 환경 속에서, 나에게 가장 알맞은 자리를 찾아야 했다.
나의 정신 상태와 호르몬의 안정적 교집합 속에 나를 위치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최대한 환경을 내가 조절해야 했다.
내게 주어진 일들에 맞게 환경을 조성하거나 찾아야 했다.
그 환경에 일을 부여했고, 그 속에서 호르몬 분비를 안정화시켰다.
인간은 호르몬에 지배받는다.
호르몬은 환경에 지배받는다.
즉, 인간은 환경에 지배받는다.
그럼 다시, 환경에 의해 내 호르몬이 바뀐다.
개인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모든 일에는 각각의 적합한 환경이 있다.
집이 휴식의 장소라면 독서실 혹은 도서관, 카페 등은 공부의 장소라고 예를 들자,
그러한 환경을 뭉개져 하나의 환경으로 일원화된다면 환경에서의 호르몬은 하나로 고정된다.
공부 수면 사랑 등 각각의 분야가 따로 존재해야 했던 환경의 장벽이 무너지면, 모든 곳에서 같은 호르몬이 분비된다.
각 분야에 필요한 호르몬이 생기지 못하고, 특정 환경으로 인해 무너졌던 호르몬이 다시 복구될 여지를 주지 못한다.
주인공 패터슨의 환경은 정확히 분리되어 있다.
일의 영역, 사랑의 영역, 예술의 영역, 일상의 영역
하지만, 예술의 영역 속에만 있던 시집이 실수로 일상의 영역인 거실로 오게 되자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현대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각종 이유로 인한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기인한다.
인간관계와 세상의 지식, 즐거움을 얻는 방식과 상업적 활동, 심지어 성욕까지 모든 영역이 통합 되어가고,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스마트폰이다.
우린 모든 것에 집중하게 되면서 모든 것을 집중할 수 없게 됐다.
기술과 문명의 발전이 곧 불행의 시작이라는 명제는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크게 경계할 필요가 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 깊게 지워진다.
통합의 시대는 우리에게 편리함이라는 축복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한다.
패터슨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일정하고 반복적인 생활 위에 올렸다.
패터슨의 삶은 단순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품에 안고 아침에 일어나 시리얼을 먹고 버스 회사에 출근해, 버스에 올라탄다. 그리고 잠시간 시를 적다가
인도인 매니저의 노크를 시작으로 버스를 운전하기 시작한다.
그 속에서 매일 달라지는 승객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다시 회사로 버스의 머리를 천천히 돌리며 하루의 일과를 마친다.
집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저녁을 먹은 뒤
자신의 개를 산책시키고, 매일 저녁 같은 바에 가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호르몬은 가장 이성적 분야이자 가장 감정적 분야다.
이성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면 감정적으로 통제하게 된다.
인생은 혼돈과 질서의 반복이다.
호르몬은 그것의 연장선이자 이성적, 수학적 풀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호르몬의 노예가 될수록 최대한 이성적으로 날 통제해야만 한다.
실연당한 후 여자친구를 잊지 못하고 감정에 지배당해 돌발행동을 계속해서 벌였던 에버렛, 자신의 삶에 항상 불평만을 늘어놓는 인도인 매니저, 하지만 생활패턴이 정형화되고 감정의 선을 지켜나갔던 패터슨은 "잘 지내냐"라는 주변 인물들의 물음에 항상 긍정했다.
패터슨의 삶과 그 주변인들의 삶들 중에서 난 어느 쪽에 속해있을까?
현대인들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자주 잃어간다.
패터슨은 자신의 무료한 일상을 보여주며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큰 힘이 무엇일까 묻는다.
영화 "패터슨"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떨어지는 폭포수를 바라보는 패터슨 옆에 한 일본인이 앉게 된다.
그는 패터슨이 평소 존경하던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패터슨'이라는 시집을 읽는다.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보던 패터슨을 눈치채고 그에게 시인이냐고 묻는다.
패터슨은 아니라고 대답한 뒤, 자신을 버스 운전사라고 소개하고 당신은 시인이냐고 되묻는다.
그 일본인은 '자신은 시로 숨을 쉰다'라는 말을 하며 패터슨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나 패터슨에게 빈 노트를 선물로 주며
"가끔은 비어있는 것들이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법이죠."
라고 말한 뒤, 떠난다.
그리고 패터슨은 그 빈 노트에 시를 적어나가고,
그 시와 함께 새로운 월요일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