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오랜만에 청국장을 끓였다.
이모가 주신 거랜다.
이모는 5년 전 아직 쌀쌀했던 4월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이모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서울에 갔다.
사실,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모가 계시던 사촌 형네 집에 들어서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알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평생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다.
사촌 형 네가 정성껏 차려주신 밥에선 짠맛이 났다.
나에게 이모는 그런 존재였다.
...
막내 부모에 늦둥이 아들이었던 나는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했다.
외할머니마저 내가 열 살 남짓에 돌아가시고, 친구들이 말하는 조부모의 사랑이 내겐,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세상에는 존재하는 단어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모는 항상 내 할머니 같았다.
이모는 한 번도 나에게 무엇을 해라, 무엇이 되라는 말씀을 해보신 적이 없으셨다.
이모집에 가면 그저 따뜻한 밥과 청국장과 방금 만든 반찬들을 내오셨다.
이모집을 갔다 돌아오는 우리 가족은 항상 이삿짐을 이고 오는 듯했다.
작게는 생선부터 옷가지, 크게는 가재도구와 가전제품들까지 이모는 항상 우리 가족에게 무엇을 주지 못해 안달이셨다.
건강이 좋지 않으셨던 어머니가 어디가 아프다는 소식만 들리면 가장 먼저 이모에게 연락이 왔다.
거친 경상도 억양으로 어머니에게 한소리 하신다.
어디 병원이 좋다. 어디 한의원이 좋다.
말씀하신 곳을 가보면 항상 이모가 한 달 치 진료비를 모두 계산해버리고 가신 상태였다.
달리 외가가 없던 우리 가족은 명절이 되면 이모네를 들렀다.
외삼촌과 외숙모, 외사촌형네와 조카들, 그리고 우리 가족이 한데 모여 꽤나 명절 분위기가 났다.
거기서도 항상 이모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하셨다.
문어숙회와 수육은 늘 대식구가 먹고도 많이 남을 정도로 장만하셨고, 산적과 나물 같은 명절 음식도 물론이었다.
음식 솜씨도 탁월하셔서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렇게 배부른 식사를 마치고 나면, 흥이 많으셨던 이모가 일어나시고 노래를 한 가락 하신다.
제목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거실에 퍼졌던 이모의 행복한 음성과 분위기, 그곳에 앉아있는 모두에게 따뜻하고 배부른 저녁을 만들어준 이모의 사랑은 기억할 수 있다.
흥겨운 노래 두 곡이 끝나고 나면,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이모는 그 자그마한 체구를 바닥에 앉히시며 웃으셨다.
...
그런 이모가 바로 저 앞에 방에 계신데, 곧 볼 수 없단다.
서러웠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죽음이 실감됐다.
눈물은 멈추지 않는데, 벌써 갈 시간이 됐다.
마지막으로 이모를 보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이모는 정좌하고 계셨다.
아마, 거실에서 내가 우는 소리를 듣고는 일어나 계셨나 보다.
껴안았다.
앙상했다.
그런 이모께 내가 사랑한다고 계속 말한다.
얼마나 사랑한다는 걸 알고 가셨으면 해서
그런 이모가 "나도 사랑한데이"하며 내 등을 쓸어내리신다.
그리고 가부좌를 트신 무릎 밑으로 봉투를 꺼내신다.
"윤환아 이거 니 대학 가면 용돈해래이"
봉투와 함께 운동기구와 바르는 약도 꺼내셨다.
어머니의 피부가 갈라졌다는 말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약을 구해오셨다.
그 작은 체구로 병마와 싸우시며,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도 우리를 먼저 생각하셨던 우리 이모.
눈물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그 순간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느끼고 싶어서.
그렇게 이모를 마지막으로 뵙고 집을 나섰고,
한 달뒤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모가 돌아가시고, 집을 정리하기 위해 이모 집에 들렀다.
평소 먼지 한 톨 남김없이 깔끔하시던 그 성격은, 돌아가신 후에도 여전히 집안 곳곳에 남아있었다.
몇 가지 가재도구를 제외하고, 집은 깔끔히 비워져 있었는데 현관 옆에 꽃이 하나 걸려있었다.
내가 이모의 칠순 때 선물해드렸던 꽃이다.
옆에는 '이모님 칠순을 축하드립니다'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었는데, 이모는 그 꽃을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셨다.
흐뭇했다. 코 끝이 찡해왔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떠나신 이모가 멀리서 대답을 남기고 가신 것 같았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흘렀다.
대학에 갔고, 나도 어느새 군대를 가게 됐다.
누구나 그렇듯, 군대에서의 생활은 처음이 힘든 법이다.
우연히도 내가 군생활을 했던 곳은 이모가 새벽마다 운동하러 가시던 장산에 위치했다.
교대근무가 일상인 보직의 특성상 불면과 숙면이 반복됐었는데, 그 생활에 적응하던 중 이모가 꿈에 두 번 나타나셨다.
한 번은 장산에 운동하러 나오신 듯, 운동복 차림의 이모가 날 보며 웃으며 말하셨다.
"윤환아 난 잘 있데이, 니도 잘 있제?" 하셨다.
그러곤 아마 잠에서 깬 것 같다.
두 번째는, 하얀빛이 보였는데 형체는 알 수 없어도, 그것이 이모임은 느낄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꿈에 나타나신 건 알 수 있었다.
두 번의 꿈 모두 이모가 날 보살펴주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누군가 내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제일 먼저 이모집에 가득 퍼져있는 청국장 냄새가 떠오른다.
또 이모의 흥겨웠던 노랫가락이, 억셌던 이모의 억양이, 그 뒤에 묻어 나오는 웃음이,
유달리 눈물 많으시던 우리 이모가 남들의 힘들고 슬픈 이야기에 눈물을 훔치시던 소맷자락이 생각난다.
그런 우리 이모가 만든 청국장을 입에 넣는다.
구수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