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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김에 신으로 살기(9)

부모는 내가 아니다.

1-6. 몸과 마음의 탄생에 기여한 부모 



 성격형성의 지배적 환경은 어린시절의 부모입니다. 전생에 습득된 선천적 기질 그리고 이생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결론으로 우린 부모를 선택하면서 태어납니다. 우리는 지구에서의 배울 것에 합당한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납니다. 운명을 탓하지만 실상은 우리가 운명의 주인이었고 필요한 체험을 위해 필요한 조건을 선택합니다. 부모가 강력하게 끌어당겨 찾아오는 영혼도 있지만 본인의 동의 없이 이생에서의 항로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는 어떤 측면에서는 합의된 관계이고 일어날 일을 일어나게 하는 역할을 서로 해주는 존재이며 자녀의 자유의지가 없이 부모의 유전적 경향성을 허락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탄생은 여러 생에 걸친 깊은 체험의 흔적이므로 부모와의 유전자 공유까지 살펴볼 때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생에서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실된 강력한 에너지로 소망한다면, 선택 과정에서 그 파동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작가가 되고 싶다거나 음악을 출중하게 잘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면 그 가능성을 열어줄 유전자를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우주는 같은 파동끼리 쉽게 조응하기에 정말 행복한 사람은 정말 불행한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에너지는 유유상종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한 방향으로 강력하게 모아진 마음 에너지는 반대체험을 통해 질적인 성장을 원하기에 반대 성향의 부모 자녀 관계에 끌리기도 하여 부모와는 대립하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가 알콜중독이라 나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던가, 나의 엄마는 자식에게 무책임한 사람이어서 나는 자녀에 집중한다던가 하는 반대체험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한편 자신의 의식의 표면에 생각으로 떠오르지는 않더라고 이번 생에서 책임감을 배우고 외로움을 극복할 과제를 원한 영혼은 부모와 인연이 일찍 끊어지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에서 크고 중대한 큰 흐름은 오래전에 뿌린 씨앗이 자란 것으로 한 두가지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내가 왜 이런 삶을 선택했는지 하는 통찰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유의지가 본성이기에 사춘기 이후 성인이 되면서 자기 자신을 세우는 과정에서 마음의 구조물을 바꾸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구조화된 마음이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에 이미 형성된 부정적 마음은 사회화 과정에서 적당히 타협되거나 잠재의식으로 저장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 뜨거운 물에 손을 데었을 때 마음이 하나 탄생합니다. 아픔은 육체에 남는 기억이지만, 마음에는 두려움이란 구조물 중의 한 조각이 생깁니다. 육체의 흔적은 마음을 만들어 조금 발전하면 ‘조심해’ 라는 개념이 이 경험과 결합되면서 완성됩니다. 부모가 매일 싸우다시피 하여 아이가 그 광경을 보면서 가정이 붕괴될 수 있다는 불안과 싸움의 과정에서 서로 헐뜯고 자기 주장하며 폭력을 쓰는 것을 보며 방치되었다면 그것을 이상하지만 있을 수 있는 정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흡수해 버립니다. 


즉 갈등이 생기면 소통과 이해 혹은 사랑보다는 미움과 저주와 폭력이라는 마음의 조각이 강력하게 형성됩니다. 이외에도 고립감, 외로움, 무기력, 공격성, 슬픔 등의 느낌을 함께 흡수하며 자연스럽게 배운 그대로 삶을 사는 경향성이 내부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부모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온전히 존경하고 사랑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대부분 효도해야 한다는 가치관과 부모로부터 받은 나쁜 영향력 사이에서 정돈되지 않은 죄책감이 내면의 갈등이 됩니다.

 이렇게 부모가 결정적인 악영향을 뿌리 깊게 심어놓은 관계가 많습니다. 폭력이나 불통과 무시 그리고 편애와 비교로 자존감을 뭉게는 부모도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이가 가장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순수한 어린 시절의 이런 악영향은 한 인격의 삶 전반에 꾸준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칭찬과 인정으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도 물론 있으며 점차 의식이 성장하여 자녀를 위해 긍정 에너지를 양육의 방편으로 선택한 부모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발전과 의식성장을 위해서도 중요한 선택이며 필요합니다. 여기서 문제점은 원칙이 없는 칭찬과 과도한 집착이 가져올 위험성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인정욕구가 삶의 중요한 가치관이 되거나 칭찬받기 위해 자신이 소외되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착한아이 컴플렉스를 가진 많은 친구들이 종종 거절하지 못하고 타인의 결정에 따라 살다 결국에는 상처를 받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경우도 종종 발견되는 이유입니다. 


 시행착오를 함께 겪으면서 평등한 인격 안에서 책임감과 존중을 받고 자란다면 부모로부터 심리적, 정서적 독립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런 태도를 배운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기에 우린 까르마라는 개념을 유전자와 함께 잠재의식 속에 담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런 프레임을 선택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부모 자식 관계의 갈등과 슬픔은 다른 어떤 고통보다 깊고, 자유를 바탕에 둔 사랑을 배울 기회입니다. 이 소중한 기회를 사랑으로 깨어나 고통의 인과관계를 용서와 감사로 화해한다면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마음 세계에서는 없습니다. 의식이 깨어나 관계에서 자유롭되 서로 사랑할 때만이 극복됩니다.

건강한 애착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서로 지지해 주는 관계가 되기 위해 몇 가지 접근법이 있습니다. 




1-7. 부모의 영향은 나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유전자의 영향이 있겠지만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로 태어난 창조적인 존재가 자녀입니다. 자유롭게 자랄수록 부모의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서 자신만의 개성이 발현됩니다. 지혜로운 부모라면 자녀가 성장하도록 영향력을 줄여주고 책임감과 스스로 판단하는 사고력을 지지해주며 인내심 있게 신뢰하며 지켜보아 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는 걱정과 두려운 마음을 자녀에게 심어주고, 자녀의 초자아가 되어 간섭합니다. 사춘기 혹은 성년이 되어가면서 부모의 영향력을 줄여 가는 홀로서기는 자존을 회복하는 지름길입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나에게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길인가? 부모와 사회가 원하는 것에만 끌려가고 있지 않은가? 이 선택에서 실패해도 내 존재를 긍정하고 배울 수 있는가?' 등의 자기만의 기준을 세워갈 때 홀로서기의 지혜를 터득해 가기 쉽습니다.


 이렇게 서로 관계의 엉킴이 줄어들 때 존재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필요한 기회들을 마련해줍니다. 우리 스스로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은 외부 환경을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작용을 합니다. 자존하려는 자에게 존재계는 자존이 가능한 길을 열어주고, 실수하더라도 자유와 행복과 연결하게 해줍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지 나를 하나로 순일하게 세우지 못하고 너무 복잡하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 같은 어떤 일들도 수많은 연결과 인과가 모여 일어나는 것이며 과거에 강력하게 심은 마음의 파동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내가 혼란스러운 다양한 타인의 가치관에 얽혀 있다면, 특히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산다면 부모 정도의 인생을 살거나, 부모보다 불행한 삶을 사는 경향이 많습니다. 강력한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녀는 자존의 길을 찾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원인이므로 결과인 ‘나’는 내 길을 스스로 두 발로 찾아가는 것부터가 의식적인 나를 세우는 출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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