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다 다르다. 한국 남성의 평균 키는 174cm이지만, 모든 남성이 174cm인 것은 아니다. 174cm 언저리에 가장 많이 분포하지만, 160cm도 있고 190cm도 있다. 평균에서 멀어질수록 수가 적어진다. 키는 눈에 보이니까 쉽게 와닿는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은 보이지 않기에 편차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워하는 듯하다. 사람마다 수면시간도 다르고 맛을 느끼는 민감도, 타인의 입장에서 느끼는 혹은 느껴보려는 정도, 지능, 행복 호르몬(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등)의 분비량 등 인간의 특성들 중 보이지 않는 것에도 편차가 있다.
감각이나 호르몬처럼 그 특성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보통 사람들은 타인이 나와 같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싱거웠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음식을 먹고 싱겁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매일 7시간의 수면으로도 피로를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은 하루에 3시간씩 잤다고 알려진 반면, 아인슈타인은 하루에 10시간씩 잤다고 한다.
인간의 생활 수준의 편차는 어떤 신체를 가지고 어떤 시대에 어떤 장소에서 태어났느냐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일반적으로 근력이 강하고 지능이 높은 것 등은 시대와 장소를 떠나서 좋은 생활 수준 영위하는 데 유용한 자질로 여겨진다. 그러나 좋은 생활 수준을 영위하는 데 유용한 정도가 시대와 장소에 독립적이지 않은 자질도 있다.
마이클 조던은 바구니에 공을 잘 넣는 퍼포먼스를 보이는 능력이 뛰어났다(물론 그것만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현대에는 그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것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마이클 조던은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좋은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도 그러한 퍼포먼스에 높은 가치가 있다고 여겼을까? 농구를 관람하면서 느끼는 희열, 경외심, 소속감 등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지금에 비해 적었다. 따라서 마이클 조던이 중세시대에 태어났어도 지금만큼 좋은 생활 수준을 영위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마이클 조던이 만약 말라위(아프리카 남부의 국가)에서 태어났어도 지금 같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미국에서 14,000km 떨어진 말라위까지 가지 않더라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난 사람과 개성에서 약 30km 떨어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사람이 영위할 생활 수준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어떻게 태어났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생활 수준의 편차가 크다.
사람마다 생활 수준의 편차가 크기 때문에,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압력이 축적됐다. 불만, 시기심, 질투 등이 쌓이게 되어 폭력으로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것이 곧 전쟁이었다. 따라서 폭력과 전쟁을 줄이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불평등을 정당화해야 했다. 그러나 불평등은 본질적으로 어떤 신체를 가지고 어떤 시대에 어떤 장소에서 태어났느냐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즉, 운에 의한 것이었기에 정당화하기가 어려웠다. 운에 의한 불평등은 책임이 개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폭력과 전쟁이 현저히 줄었는데, 이는 사회 질서 덕분이다. 고대와 중세에는 ‘신’이라는 개념으로 사회질서를 확립했다. 불평등은 신이 그렇기 정한 것이기에 정당화되었다. 지배 계층은 신으로부터 지배 권리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현대에는 사회 질서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개념 중에 하나가 노력이다. 노력을 칭송하고, 노력에 보상한다는 규범은 인간에게 신체를 통제하는 어떤 자아가 있어서, 그 자아의 선택에 의해 편차가 발생한다고 여기게 하여, 편차를 정당화한다. 편차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려야 사회에 쌓이는 불만의 압력을 낮출 수 있다. 자신이 못난 이유가 자신의 탓이라고 여겨야 그 불만족을 해소하기 위해 외부로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을 억제할 것이다. 따라서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근면의 가치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잠을 많이 자는 사람은 게을러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종종 접한다. 누군가는 하루 4시간씩 자면서 죽어라 노력해서 성공한다는 사례를 언급하며 8시간씩 자는 사람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잠을 참지 못해서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4시간을 잤을 때 각각의 인간 개체가 어떤 주관적 경험을 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밝혀진 것은 인간의 특성들 중 보이지 않는 특성들에도 편차가 있다는 것이다. 오래 자고 싶어도 4시간을 자고 나면 다시 잠들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간 개체마다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단일한 자아가 있는지, 있다면 그 자아가 신체를 통제하기 위한 어떤 판단을 할 때 선택권을 온전히 누리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떤 개인이 낮은 생활 수준을 누리는 것이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동의하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