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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국 Dec 07. 2021

당신은 욕망 충족 위해 태어난 사람

    한국이 근 50년 사이에 서구권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이뤄낸 산업화를 이뤄낼 수 있었던 건 욕망 덕분이었다. 주변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말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박탈감을 느끼게 하여 무한한 욕망을 자극했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과 원하고 싶은 것을, 자신이 원하는 것과 타인이 원하는 것을 혼동했다. 그렇게 자극된 수많은 욕망의 대부분은 충족하지 못했다.


    박탈의 책임은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생산성을 향상하게끔 동기 부여했다.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다면 일하라. 당신이 루저로 사는 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성은 급격히 성장했고 지금은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선진국이 되었다.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그러니 우리는 부단히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박탈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려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최대 다수의 최대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곧 사회 발전이라고 정의한다면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사는 것인가? 무한한 욕망 충족이 곧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인가? 인간의 감각은 순응한다. 같은 자극이 반복되면 점점 자극에 무뎌진다. 강렬한 자극은 곧 더 강력한 자극을 찾게 만든다. 욕망이란 밑 빠진 독과 같아서 아무리 충족시켜도 이내 공허해진다.




    우리에게는 필수적으로 충족시켜야 할 욕망이 있다. 어떤 욕망이 필수적으로 충족해야 할 욕망인지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르겠지만, 목숨과 관련된 것들, 즉 먹는 것과 안전하고 청결한 생활환경 그리고 아픈 곳을 치료받는 것 등은 충족해야 마땅한 욕망이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교육도 포함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나 의무교육제도가 사람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며, 우리나라는 이미 이런 제도를 시행해오고 있다. 이런 필수적인 욕망은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답게 살기 어렵다. 따라서 필수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까지는 우리는 욕망을 자극하여 사회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또 다른 필수적인 욕망은 인정 욕구다. 우리는 모욕당하며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인정하는가? 보통은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인정받겠지만, 다시 어떤 능력에 뛰어난가, 어떤 인격이 훌륭한 인격인가가 문제가 된다. 내 생각에, 꼭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만을 인정한다기보다는, 좀 더 각자의 개성을 포용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명백하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삶의 방식이 아닌 한, 우리는 타인의 가치관을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많은 사람이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포용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타인을 깎아내림으로써 스스로가 인정받는다고 느끼는 것 같다. 타인을 깎아내리며 자신을 추켜세우는 사람이 과반인 듯하다. 타인의 개성적인 삶의 방식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개성으로 인정받기보다는 사회의 획일적 잣대인 돈을 벌어서 인정을 받고자 한다. 그래서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생산성을 향상하려 한다. 그러나 최대 다수의 최대 '인정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는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성을 향상할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포용력을 향상해야 한다. 포용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해보려 치열하게 시도해야 한다. 나는 대체로 각자가 옳다고 믿는 삶의 방식에 따라 사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타인의 가치관을 인정하는 폭이 좁은 독선적인 사람을 긍정하기는 어려워한다.




    필수적인 욕망이 충족된 다음에는 어떨까. 요트를 갖는 것이 필수적인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은 각자 이런 필수 이외의 욕망이 있다. 그러나 감각은 순응하며 욕망은 끝이 없다. 설령 끝이 있다 하더라도 그 끝에 도달할 때까지 사회 발전을 이룩하여 욕망을 다 충족하고 나면 그다음엔 무엇인가? 우리는 다시 무엇을 위해 사는가로 돌아오게 된다.


    삶의 목적은 없다. 그 공백을 견디기 어려워 우리는 삶의 의미를 가정하고 산다. 대체로 가정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믿어지는 대로 산다. 삶의 목적을 정할 수 있으려면 그것이 가정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없는 것을 있는 척해야 하기에 삶의 목적을 정하는 건 어찌 보면 맹랑한 일이다. 만약 당신에겐 그것이 정해질 수 있는 무엇이라면, 정하려 시도해봐야 한다. 정하여 그것을 위해 살라. 그것으로 당신의 삶은 충만할 것이다.


    그저 믿어지는 대로 속 편하게 사는 걸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행복의 지름길이다. 행복을 위해 산다는 사람이 많다. 최대 다수의 최대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가? 욕망 충족이 곧 행복인지도 의심스럽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두의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유로운 사회를 위해 분신자살을 했다던가, 민주화를 위해 감옥행을 마다하지 않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모두가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여긴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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