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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Nov 29. 2021

고흥의 외딴 팬션에서의 발견

타인의 시선에서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다

얼마 전 전라남도 고흥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고흥으로 여행지를 정한 이유는 하나였다. 인적이 드물어서다. 창문을 열어놓아도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골 마을에 가고 싶었다. 내 자신을 입히고 먹이는 일을 제외한 모든 생각에서 해방되는 공간을 갈망했다.


여수에서 삼십분 가량을 달려 고흥에 접어들자 여행지를 제대로 골랐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작은 섬과 언덕 봉우리 사이마다 흝어진 바다는 파랗게 개인 늦가을 햇빛에 아이들 눈망울처럼 반짝거렸다. 구불거리는 국도 77호선의 커브를 돌 때마다 등장하는 다도해의 비현실적인 경치는 운전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소맥산맥 끝자리에 위치한 팔영산은 고흥 반도를 지키는 장승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분주하게 야채를 손질하며 서울에서의 조급한 성미가 되살아났다. 서둘러 음식을 뽑아내듯 요리의 과정보다는 효율성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고흥의 여유로움을 즐기려고 온 여행이라는 걸 까맣게 잊은 채. 


머리에서 송골송골 땀이 맺히자 깔끔히 샤워를 마친 채 저녁을 먹고 싶다는 욕심에 요리를 중단하고 욕실로 향했다. 문득 샤워로 쓰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졌다. 파스타를 삶을 냄비를 전기 인덕션에 올려 놓고 타이머와 핸드폰 알람까지 맞춘 채로 샤워기 물을 켰다. 요리와 식사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분 단위까지 쪼개 계산하는 도시에서의 버릇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 유령처럼 백양리의 펜션 안으로까지 따라 들어왔다.


효율에 대한 강박이라는 유령의 존재을 알아차리게 된 건 샤워기의 따뜻한 물살이 안도감이 아니라 조급함을 더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였다. 재깍거리며 내려가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냄빗물을 올려놓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즐길 수 있었던 샤워 부스에서의 안도감을 빼앗아간 건 내 자신이었기에, 문득 회의감과 쓴웃음이 몰려왔다. "나는 탈출하고자 찾아온 여행지에서도 스스로를 가두고 있구나." 순간의 깨달음이었다. 지난 몇 주간 잘 풀리지 않는 일 때문에 답답해했던 내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지켜본 기분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지키기 어려워하는 것들을 타인에게 조언하고 요구한다. 매일 꼬박꼬박 운동하기가 남편 밥차려주기보다 싫은 어르신이 같은 노인정에 나와 있는 친구에게 매일 운동을 보약이라 설파하고, 학창 시절 공부라고는 담을 쌓았던 사업가 아버지가 아들에게는 일정 점수 이상을 가져오라며 윽박지른다.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의 효력을 키우기 위해, 남들에게도 같은 주문을 건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이라는 걸 고흥의 샤워 부스에서 깨달았다. 친구들에게 조금 더 느긋함을 가지라며, 조급해 할 필요가 없다며, 너 정도면 충분히 잘난 사람이라고 여유를 설파하던 내가 사실은 누구보다도 효율성에 집착하는 결과 지향적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오늘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주제 넘은 참견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보기로 했다. Life is a journey. So sit back and enjoy your r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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