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호 Feb 23. 2021

영원한 안녕을 위해

2019. 5 | 아버지같던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우리 외할아버지는 나한테 아부지 같은 존재였다. 어렸을 때 부터 과묵하지만 든든하고, 인자하지만 때로 겉잡을 수 없이 역정을 내실 때면 한없이 두려워지는 그런 소나무 같은 아버지. 여행을 좋아하는 당신 덕분에 난 서울 촌놈이 아니라 강과 바다, 산과 들판을 쏘다니며 자랄 수 있었고, 사물에 대한 호기심과 냉철한 판단력을 기를 수 있었다. 그가 흔한 노인들과는 다른 깨어있는 어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당시 나의 생각을 "빨갱이 소리"라는 역사의 폭력과 무지가 담긴 말로 일축하셨을 때 큰 충격을 받았었다. 밥상머리에서의 빨갱이 사건 이후 나는 당신을 존경하는 소나무보다는, 인생 막바지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을 느끼며 늙어가는 작은 노인처럼 보기 시작했다.


고2부터 군대가기 전 봄까지는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연습하는 시간이었다. 당신이 살아온 시대적 한계, 그와 나의 세대적인 한계를 넘어 서로 공감할 방법은 전무했고, 당신과의 대화는 그와 내가 피붙이이고 같은 언어를 쓰지만 사이에 얼마나 가파른 절벽이 자리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들이었다. 싸움과도 같은 당신과의 격정적인 대화 끝에 자리를 뜰 때면, 씁쓸하고 답답한 마음만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2015년 경의 할아버지의 모습

2년 동안의 짧은 유학 생활을 잠시 마치고 군 복무를 위해 귀국한 16년 봄, 할아버지와 둘이 들린 병원에서 당신은 담담하게 위암 4기 판정을 듣고 아무 말 없이 걸어서 집에 오셨다. 첫 수술은 더 만족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었지만, 항암치료는 부작용 때문에 중단했다. 위암이 담도와 담낭으로 전이되어 재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18년 6월부터, 우리 가족은 언제든지 당신이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지만, 당신은 충분히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 믿었다. 막힌 담즙을 빼내고 인공 담관으로 교체하고 나서도 그는 친구들과 전화하며 큰소리를 치셨고, 나는 그렇게 그가 죽음에 대한 부정에서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 1년만 더 살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타협의 단계에 접어드는 것을 목격했다. 은퇴 이후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마주하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셨다던 당신은, 죽음이 눈 앞에 닥쳐오자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삶을 향해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감정은 존경심과 경외감에서 답답함과 실망감으로, 그리고 고통을 억누르며 삶에 대한 희망을 놓치 못하는 당신에 대한 연민으로 변해갔다. 안타까움과 불쌍함. 연민. 그것이 우리 외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최근의 감정이었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도, 갑작스럽게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공항에서 내려 익숙한 남양주행 버스가 아니라 아산병원이 있는 잠실행 공항버스를 타는 순간까지도, 내 생각은 우리 할아버지에 머무르지 않았다. 3월 말 짧은 방학에 충분히 그를 봐서 그랬을까, 아니면 당신이 죽음 전 몇 달간 보여주신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모습 때문이었을까, 슬픔보다는 당신의 장례식에 올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감사하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가족들 얼굴을 볼 생각에 조금 들뜬 것도 사실이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조문한 우리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손님들은 모두 당신이 정말 멋있는 삶을 살았다며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글과 내가 그와 나누었던 대화에서 나타나던 지배적인 감정은 외로움이었고, 분노였고, 답답함과 실망감이었다.


개천에서 용난 지식인이자, 공학자이자, 글쟁이였던 당신은 은퇴 후 오랜 시간을 소외감과 공허감과 싸우며 사셨고, 스스로를 닫아버리며 할머니가 자식과 손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당신도 그걸 인지하고 바꿔보려고 노력했지만, 평생의 습관으로 자리잡은 말과 행동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면 할 수록 그를 족쇄처럼 잡아당겼을지도 모른다. 바깥에선 한 없이 좋은 평가를 듣지만 집 안에선 자주 신경질적으로 변하곤 했던 당신. 병마와 싸우면서 당신은 더더욱 자주 성질을 내셨고 우리들은 조금씩 지쳐갔으며, 그의 고통에 무더졌다.


그랬기에 담담하게, 그리고 손님들과 웃으면서 당신을 손쉽게 떠나보낼  있을  알았다. 장례 절차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던 나는, 할아버지 ''하니깐 금요일 11 전에 병원으로 오라는 엄마의 말이 무엇인지 까맣게 몰랐다. 염이란 말에 염주를 떠올려 불교식 장례 행사의 일부인 줄만 알았다. 그게 깔끔하게 씻겨진 당신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보는 기회인 줄은 장례식장 지하에 내려가 그곳이 시신 안치실임을 보고야 깨달았다.


수의를 깔끔하게 입힌 할아버지의 시신을 장의사가 꺼내오자, 그의 눈 위에는 거즈가 올려져 있었다. 당신이 너무나도 여윈 탓에 눈을 감지 못해 가족들이 힘들어 할까봐 올려놓은 것이라고 장의사는 설명했다. 이모와 혜린이가 흐느껴 울기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큰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버틸 수 있는 슬픔인데 울어서 무너져 내리고 싶지 않았다. 임계점을 넘지 않는 감정의 파도를 억지로 헤집어 내어 눈물을 비틀기 싫었다. 한 달에 십수 명의 장례식을 지켜볼 상조회사 직원들 바로 옆에서 의례 흘려야 하는 눈물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치 그 눈물의 의식이 고인의 대한 효을 다하는 것처럼.


하지만 우리 할머니의 “성주 아빠, 더 이상 아프지 말고 고통 없는 곳에 가서 행복하게 지내. 내가 곧 따라 갈게”라는 말이 트리거였다. 할머니의 슬픔이 내것 같이 느껴지면서도 나도 더 이상 내 감정을 주체할 도리가 없었다. 시신 안치실에 들어오기 전에 엄마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내가 올 수 있도록 일부러 배려해서 시험 기간을 피해서 돌아가신 것 같다고 한 말, 의식은 있지만 말을 못하시던 며칠 간 누구를 기다리는 것 처럼 창문 밖을 계속 내다보시길래, “아빠, 민호는 못 와”라고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의식을 완전히 놓으셨단 말, 그리고 3월 봄 방학 마지막 날 시카고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문병 오신 친구분들과 말씀 나누기 바쁘셔서 제대로 한번 안아주지도 못하고 손만 흔들고 온 게 떠올랐다. 고맙고 사랑한다고, 엄마랑 할머니한테는 자주 했던 그 말을 왜 안했는지. 인사말으로라도 건낼 수 있었는데, 완전한 진심이 아니면 안하겠다는 이상한 고집 때문에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아편보다 수백 배가 강한 펜타닐 패치 여러장을 붙이고 고통을 잊고자 건강한 사람도 중노동일 나무 공예를 하루 종일 붙잡고 있었어도, 당신은 내가 집에 들어올 때면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셨던게 생각이 났다. 50년을 같이 산 할머니에게 거칠게 내시던 짜증 한번 내게 내신 적이 없었어도, 당신의 큰 손자인 난 사랑하고 고맙단 얘기 한마디를 못했었다. 할아버지 얼굴을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져볼 수 있다는 말에 난 뼈밖에 남지 않은 당신의 차가운 얼굴을 처음으로 안아봤고, 오열했다. 상조회 직원분이 꽃 한송이씩 나눠주면서 관 닫기 전 마지막 한마디 하라는 말씀에 뭐가 부끄러웠던지, 당신만이 들을 수 있을 조용한 목소리로 나즈막히 “할아버지 고마워요”라고 겨우 뇌까릴 수 있었다. 나의 고맙다는 말은 편지와 같았다. 종이에 할 말을 적어 우표를 붙여 실어보내면 발화의 과정이 막을 내리는 편지처럼 일방적인, 수신인이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알 방법이 없는, 할아버지한테 남긴 편지 같은 나의 마지막 말은 “고마워요”였다.

2019. 5, 아산병원 장례식장 21호


그렇게 감정을 추스려 2층에 있던 식장으로 올라오니 그곳은 산자들의 세계었고, 고인을 그리며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매웠다. 신발을 벗고 21호실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영정의 우리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세상 인자한 모습으로 활짝 웃어주었고, 나는 그제서야 그가 떠났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왼손잡이와 혐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