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2. 7 |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합격자의 입학 포기 사태를 보며
'일반 대학교가 있는데 여대가 요즘 굳이 왜 필요해?'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여러 정답이 있겠지만 "남성중심적인 사고가 아직도 지배적이고, 가부장제를 구조적으로 여성이 내면화하기 쉬운 공학보다는 여대가 여성이 자유로운 사고를 하며 독립적인 인격으로 커나가기 용이한 곳이기 때문에 여성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신장된 현대 사회에서도 여대의 필요성은 충분하다"라는 대답이 나는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여대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 사회적 소수자이고 약자인 여성의 안전 공간(safe space)이 필요하다는 맥락 아래에서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공간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 속에서 모든 인격체를 획일화하는 압력이 강력하게 적용하는 한국 사회는 조금 더 다양해진다.
그런데 다양성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처럼 소수자이면서, 여성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개인을 매몰차게 내던져 버렸다. 여성은 약자이지만, 시스젠더(cis-gender, 태어날 때 성과 스스로의 규정하는 성이 같은 사람) 여성은 트랜스젠더(transgender) 여성에 비해서는 강자이다. 숙명여대를 다니는 20대 대학생은 40대 대기업 남성 과장에 비해선 사회적 약자이지만, 대학 문턱을 밟지 못하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같은 또래 20대 여성에 비해는 강자이다. 학벌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인서울 4년제 대학을 다니는 20대 대학생과,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당한 동년배의 트랜스젠더 여학생 중 누가 더 강자고 약자일까.
누가 강자이고 약자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더 약자라고 주장하는 족쇄 자랑, 훈장 자랑보다 더 꼴사나운 일은 없다. 개인과 사회에 작용하는 억압(oppression)을 이해하려면 하나의 층위만으로는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상호교차성을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는 개념은 우리 누구 하나 절대적인 사회적 강자나 약자가 아닌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기에, 우리에게 작용하는 차별과 억압을 이해하려면 젠더, 계급, 인종, 국적 등을 다양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연대의 중요성이 싹튼다. 다양한 사회적 억압을 받는 우리들이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고 그 억압을 같이 철폐하려고 노력할 때만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남성이자, 이성애자이고, 서울 토박이 출신이며, 부모 덕분에 중산층의 생활 수준을 누리고 사는 내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이고 LGBTQ의 연대자(ally)라고 말하고 다니는 이유는 그들이 자유롭지 못하면 내가 자유롭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내 여동생과 여사친들과 여자친구가 밤거리와 공중화장실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내 게이 친구들이 스스로의 가장 중요한 부분조차 자랑스럽게 꺼내지 못하는 사회는 나의 행동과 사고도 제약한다. 성공한 이성애자 남성만 제대로된 인간으로 대접받는 사회가 한국 사회라면, 여사친이 많고 전통적인 의미에서 남성답지 못하며, 게이 친구들이 많은 나는 제대로 된 남자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트랜스젠더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배척받고 혐오받는 사람들이다. 의경 복무 중 순찰하던 남산 소월로에는 트랜스젠더 성노동자들이 있었다. 적어도 40살은 넘어보이던 아주머니들은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도축장의 강아지들처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길 한복판에서 짧은 치마와 하이힐, 강한 향수를 뿌리고 킹키한 취향을 가진 아저씨들이 자신들을 보고 멈추기를 기다렸다. 그들에겐 그게 생계다. 같은 여성들조차 밀어내기에 급급한 나이든 트랜스젠더들이 생존을 위해 다른 직업 선택의 여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우리 부대 사람들 모두가 그들의 존재를 알았지만, 아무도 개입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는 성매매가 불법이고, 우린 의경 나부랭이였지만 경찰이었는데도 말이다. 만약 거기 서있는 성노동자가 나이든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20대였다면, 용산서에서 십수년 동안 가만히 놓아 두었을까? 나도 낄낄거리는 후임들에게 한 마디하고 그들이 건내는 인사를 받는게 고작이었다. 우리는 트랜스젠더 여성, 특히나 나이든 성노동자 트랜스젠더 여성은 그런 취급을 받는게 당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만약 숙명여대 학생들이 19살 트랜스젠더 소녀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다양성을 위해 존재하는 커뮤니티의 일부로 받아들여줬다면, 우리 사회의 트랜스젠더 소녀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긍정하는 계기가 됐을지 모른다. 그 소녀들은 유튜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관음적인 컨텐츠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판매하거나 길거리에서 성을 판매하지 않는 다른 미래를 꿈꿨을지도 모른다. 가장 배척받는 이들에게 건내지는 조그만 조각의 공감과 인정은 생각보다 큰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그 문을 닫고,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을 정정한 트랜스젠더가 여대에 입학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혐오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저 여성들의 안전한 공간을 지키기를 원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혐오자들은 절대 스스로를 혐오자라고 하지 않는다. 미국 극우 대안 우파(alt-right)들도 자신들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점점 위험해지고 있는 백인들의 공간을 지키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유색인종이 백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듯 트랜스젠더들도 여학생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대안 우파 백인 쓰레기(white trash)들이 위협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들의 인종차별적인 생각이 허무맹랑한 뇌피셜 망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반대하는 자칭 페미니스트들도, 스스로의 편견과 혐오가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적인 공포와 망상을 양산하고 있는 건지 뒤돌아 봐야하지 않을까. 여성주의는 평등과 연대를 여성의 시각에서 외치는 정치적 목소리지, 페미니즘의 입을 훔쳐 여성을 자의적으로 정의하고 스스로를 이익집단화하는 이기심의 목소리가 아니다.
치솟는 분노 속에서도 그나마 희망의 빛 한줄기는 남아 있다고 느낀 이유는, 숙명여대 안에서도 스스로의 편견, 차별 그리고 이성애 중심주의적인 관점을 성찰하는 목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고정관념을 근거로 ‘진짜 여성’과 ‘가짜 여성’을 나누려는 시도에 강한 우려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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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현 시대의 통찰로써 읽히는 2014년의 한국일보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