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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호 Feb 23. 2021

N번방과 우리의 거리, 그 연루성(complicity)

20. 3. 23 | 우리 사회의 성적 엄숙주의와 N번방

1년 전 이맘 때 버닝썬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당시 우리는 유명 연예인이 운영하는 클럽의 소위 VIP방이란 곳에서 강간용 약물(rape drug)을 사용한 성폭행과 그 과정을 찍은 영상물이 무차별적으로 유포되는 중범죄, 그리고 상당수의 주범과 공모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유유히 걸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아야 했다. 클릭질에 목숨을 건 일부 연예기자들은 아직도 버닝썬 사건 범죄자들이 짓밟은 피해자들의 삶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며칠 전인 승리의 입대 날에도 차에 동승했던 강아지를 근거로 들며 유 모양과의 연애설에만 집착하고 있다. (https://bit.ly/2y2aHNh)


무기력감은 분노로 이어진다. 미투가 시작되고, 안희정을 잡아 가두고, 혜화역에서 불법촬영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 이후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N번방 성착취물 사건” 말고 또 있을까. 여성의 몸을 술자리 대화 속 안주거리로 소모하는 것을 넘어서 26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비공개 텔래그램 방에 들어가 협박과 학대 속에서 촬영된 성착취물을 삼겹살 음미하듯이 즐겼다는 사실은 분노를 자아낸다. 


정의에 대한 목마름으로 생긴 분노는 악에 대한 단죄를 요구한다. 사법제도는 일차로 절차에 따른 “공적인 복수”를 달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박사”와 그와 같이 일한 자들은 수십 명의 피해자들의 삶을 짓밟은 대가를 크게 치뤄야할 것이다. 그들의 신상 공개를 요구하는 분노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엄정한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수십 만원이나 되는 돈을 내고 N번방 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26만 명이나 되는 우리 사회에서, 법의 이름으로 N번방 사건의 주범과 공모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한다고 또다른 피해자의 양산을 막을 수 있을까? 세금을 착복하던 자들이 강산을 채우던 조선 말기에 향리 몇 명을 능지처참 한다고 사회가 개혁되었다면 조선이 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노하는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의 어떤 병폐가 다수 시민들의 비틀린 욕망을 양산했는지 돌아봐야 한다. 


한승혜 칼럼니스트가 말한대로, "N번방에 들어가고자 했던 남성들[의] 최초의 욕망은….어릴 때의 나처럼 낯선 것에 대한 관심, 금기된 것에 대한 욕망, 타인에 대한 갈망, 정서적 육체적 친밀함에 대한 욕구”와 같이 인간 기저의 깔린 욕망이었을 것이다(https://bit.ly/39c8onI). 그 욕망이 왜 건전한 방식으로 해소되거나 이성에 의해 제어되지 않고 타인을 해하는 뒤틀린 방식으로 터져나왔을까? 나는 그 이유를 우리나라의 억압적이고, 위선적이며, 성차별적인 섹스에 대한 태도에서 찾는다. 


최연소로 연대 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던 마광수는 1992년 한국 사회의 억압된 성의식을 드러내고자 자유로운 섹스를 즐기는 “사라”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소설인 <즐거운 사라>를 출간한다. 당대에 유통되던 일어 번역본 외설 잡지들의 수준과 별 다를바가 없었던 이 소설 때문에 마광수는 “건전한 성의식을 심각하게 왜곡”한다는 이유로 검찰에 구속기소 되었고, 결국 대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는다. 마광수는 “그는 거미와 같았다. 그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촉수처럼 뾰족하니 쳐들고 나를 간지름 태울 때, 나는 자지러질 수 밖에 없었다”와 같은 문장들 때문에 범죄자가 되었다. 


과연 마광수의 유죄판결이 28년 전의 유교탈레반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버린 해프닝으로 보기엔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사람의 가장 기본적 욕구인 성적 욕망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나를 포함한 많은 우리나라 20대들도,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나”를 주어로 놓고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아니 터부시한다. 내가 어떤 성적 행위를 좋아하고, 내 파트너가 어떻게 해주는 걸 좋아하고, 어떤 성행위가 나한테 맞지 않는지를 꺼내 놓는 대화는, "내가 까르보나라를 좋아한다”와 같은 대화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지만 우리는 이러한 대화를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하고, 꺼내지 않는다. (죄악시한다,가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스스로의 성생활과 취향, 그리고 기호에 대해서도 범죄 사실 마냥 부끄러워하기에, 킹크(kink)라고 불리우는 특이한(non-conventional)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성적 기호는 더더욱 억압된다. 이러한 자기검열과 도덕적 엄숙주의 속에서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섹스에 대한 담론이 설 위치는 더더욱 줄어들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타인에 대한 애정과 육체적 사랑에 대한 욕구는 가장 사적인 공간에서만 스스로, 혹은 애인과 조용히 이야기되고 처리되어야 마땅한 것이 되고 만다. (그게 자위가 됐건,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가 되었건, 원나잇스탠드가 되었건, 페티쉬즘 같은 “변태적” 섹스가 됐건 말이다.)


아이러니한 건, 내가 어떤 섹스를 좋아하는지 말하기를 죄악시하는 일부 남성들이, 여성의 신체와 그들의 성을 대상화하는데는 무척 열심히라는 것이다. 고(故) 마광수 교수와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우리 사회의 “성 알레르기” 증상에 대한 지적은 해당 남성들의 끊임없는 비인간적인 여성 대상화와 성상품화를 긍정하는 논거가 아니다. 그렇게 착각하는 많은 남성들은 술자리에서 섹스에 대한 이야기의 주어를 “나”로 놓지 못하고 걔 가슴이 얼마나 죽여줬느니 엉덩이가 어땠느니 같은 토사물을 입으로 배설한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들이 자신의 성기를 놓고 굵기가 어땠느니 질감이 어땠느니 이런 얘기를 부끄럼없이 했으면 바로 이중잣대를 들이밀고 기겁을 했을 종류의 사람들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의 성생활에 대해 말하지 않고, 여성을 끊임없이 대상화하는 우리나라에선 조금만 사생활의 장막이 쳐지면 성에 대한 집착이 시작된다. 거기서 여성의 욕구와 두 인간간의 “관계”는 사라지고 남성의 비뚤어진 욕구만 남는다. 강남 8학군 명문중고교와 멀지 않은 곳에 텐프로니 귀청소방이니 키스방과 같은 사람을 돈으로 사는 성매매업소가 판을 치고, 단속을 해야할 고위 경찰관들이 성상납을 받고 눈감아주는 기이한 공생관계가 이어진다. (https://bit.ly/2xeaXs6


수십억원 대 강남 아파트에 살며 수동적으로나마 룸살롱 문화에 눈감는 50대 아버지들은, 비슷한 나이의 딸들에게는 설명도 없이 신데렐라와 같은 12시 통금을 강요하고 딸들의 성적 욕망을 죄악시하고, 부정한다. 20대 초중반 여자애들이 수도 없이 듣는 “오빠는 남자라서 괜찮고 나는 여자라서 빨리 들어와야한대”의 이면에는 단순히 남녀차별이 아니라 비뚤어진 욕망의 N번방 유료회원들과 권력과 재물에 취한 승리와 정준영이 있다는 사실을 왜 우리 사회는 보지 않으려고 있을까. 무지는 단순한 모름이 아니라 알지 않으려는 부지런한 노력이다. 


우리는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연금마저 거부당한 마광수가 2009년에 했던 말을 되돌아봐야한다. 마광수가 당시 “한국 성문화의 현황 및 진단”이라는 한겨례 칼럼에서 했던 말을 밑에 옮긴다:


“성 자체 또는 성을 각자의 개성대로 즐기는 방법에 대한 ‘도덕적 선입관’이나 편견, 심지어는 중세기의 마녀사냥식 ‘모랄 테러리즘(moral terrorism)’이 횡행하는 사회는 대부분 문화적 후진국들이다. 말하자면 상식과 지성이 통하지 않고 이중적 위선만이 난무하는 사회인 것이다. 문화적으로 후진된 사회일수록 ‘성’이란 말만 나와도 그 말을 공식적으로 꺼낸 사람은 기득권 사회에서 멸시되거나 무시되어진다. 그러면서 성은 점점 더 음지(陰地)로 숨어 들어가 더욱 변칙적으로 창궐한다. (https://bit.ly/2UxiASB)”


나는 초중고 12년을 한국에서 다니면서, 한번도 공교육 과정에서 콘돔, IUD, 경구피임약, 정관수술, 질외사정 등과 같은 다양한 피임방법이나, 수정이 일어나려면 도대체 어떻게 정자가 난자가 있는 난소 안으로 들어가는지, 왜 낙태는 불법이고 낙태 수술은 정확히 어떻게 진행되는 수술인지 들어보지 못했다. 그저 쥐가 수정하는 장면을 배우는 것 처럼 정자와 난자의 “신비로운” 수정을 되풀이해서 설명해주는 중학교 가정 시간이 전부였고, 초등학교 때는 낙태가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가하는 신체적 충격을 설명하고 20주가 넘어가는 태아가 낙태된 사진을 보여주는 충격요법을 간호 선생님한테 성교육이랍시고 받은 것이 전부이다. 


이런 성교육을 받고, 만연한 도덕적 엄숙주의를 흡수하며 자란 우리 20대들이 성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히 하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섹스에 대한 억압, 위선적 태도, 남녀에 대한 이중잣대가 살아 있는 한 마광수 교수가 생전에 지적한 대로 “성은 점점 더 음지로 숨어 들어가 더욱 변칙적으로 창궐”한다. N번방, 그리고 승리와 정준영은 일부 성 도착자들이 아니라 우리의 어두운 면을 조금씩 품고 있는 것이다.


순전히 “한남”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2015-2016년에 급물살을 타고 올라왔던 워마드는 여성들조차도 지독한 성차별의 잣대를 깨고 “한남”들이 하는 방식으로 타인을 대상화하고 상품화하는 방식으로만 충분히 성을 소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단순히 양비론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페미니스트 작가 사라 아메드(Sarah Ahmed)가 말한 것처럼 “[변화를 위해] 전략적으로 사고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문제의 일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순수하다는 생각과 문제와 유리함으로써 생기는 안전함을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조사중인 문제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문제의 일부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When we have to think strategically, we also have to accept our complicity: we forgo any illusions of purity; we give up the safety of exteriority. If we are not exterior to the problem under investigation, we too are the problem under investigation.”)


한국 문화를 내면화하고 한국인으로 자란 우리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왜곡된 내면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섹스에 대한 뒤틀린 욕망을 타인과 공유하고 성찰하고,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밥을 먹으면서 남자친구와 여자친구 이야기를 하듯 "나"를 주어로 놓고 섹스 이야기를 조심스럽지만 용기있게나마 꺼내야 한다. 스스로의 욕구를 긍정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내가 어떻게 이러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는지 성찰할 때만, 우리 사회에서 섹스는 음지에서 벗아나 또다른 N번방 피해자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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