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봉사활동을 마치고 귀국을 한 지 벌써 다섯 달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2024년 12월 27일까지 캄보디아에 있었으며 이후 귀로여행으로 인근 국가인 태국과 라오스, 그리고 베트남을 다녀왔다. 그리고 1월 17일 귀국을 했다. 귀국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설 명절을 지냈고 또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금은 바쁘게 지냈다.
한국에 돌아와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이 묻는 말은 한결같다. 더운 나라에 가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건강은 괜찮은가요? 캄보디아에서 재미있게 지내셨습니까? 그러면 나 역시 한결같이 대답했다. 더워서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즐겁게 잘 지내다 왔습니다, 캄보디아 아이들 순수하고 정이 많아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이 대답은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다. 지난 1년 동안 아이들을 만나면서 늘 생각했던 것이기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
며칠 전 국립바탐방대학교 한국어학과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했는데 나는 그 소식을 텔레그램 단톡방에서 보았다. 3학년 리응과 4학년 뗍 뽀레이가 사회를 보는 모습이 보였고, 신입생들과 재학생들이 자기소개를 하는 모습도 그 안에 있었다. 그리고 신입생들의 입학을 축하하기 위한 춤 공연도 빠지지 않았다. 낯선 신입생의 얼굴도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반가운 얼굴도 그 속에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떠난 후 남아서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권선생님, 오선생님, 코워커, 학부장의 모습 역시 내 시선을 자꾸 그곳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지난 1년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 사람들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2023년 12월 28일 코이카 일반봉사단 160기로 캄보디아에 갔다. 수도 프놈펜에서 5주 간 현지적응교육을 받고 2월 1일 바탐방으로 갔으며 이후 국립바탐방대학교에서 임기를 마칠 때까지 한국어학과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 사이에 나는 42도가 넘는 더위와 씨름을 하면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고 또 학교가 물에 잠겨 바지를 둥둥 걷고 사무실로 들어가기도 했다.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과 웃음을 나누기도 했고 또 그들의 장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가끔은 같이 소풍을 가기도 했고 정규 수업이 끝난 뒤에 말하기 대회나 쓰기 대회, 그리고 토픽 시험을 위해 따로 만나 더운 시간을 같이 보내기도 했다. 한국어학과의 날 행사를 앞두고는 희망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풍물을 가르치고 또 짧게나마 공연을 했으며 아주 드물게 그들과 맥주를 마시며 같이 황홀한 저녁노을을 보기도 했다. 수업이 없는 주말에는 바탐방 지역을 혼자서, 혹은 바탐방을 방문한 사람들과 같이 두루 돌아다니기도 했고 더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는 시엠립이나 프놈펜, 캄폿, 시아누크빌, 몬둘끼리 등지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바탐방대학교에 처음 간 2월 초에는 한동안 1학년 수업만 했다. 2, 3, 4학년들은 이미 선배 단원들이 수업을 하고 있었고, 또 그들은 2월 중으로 학기가 끝나기 때문에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수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가 3월, 새학기가 시작하면서 나는 1학년과 2학년, 그리고 3학년 수업을 하게 되었다. 이들과 한 학기를 지낸 후 10월 새 학년도가 시작되면서 나는 2학년과 3학년 4학년 수업을 했다. 그 때가 임기 두 달 정도 남은 시점이라 중간고사를 칠 때까지만 수업을 하고 남은 시간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그러하기에 1년이 힘들면 몇 달 만이라도, 이 아이들 학기를 마칠 때까지 3개월만이라도 연장을 해 볼까 심각하게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내 주변의 사정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 결국 학기 중간에 아이들과 헤어져야 했다.
앞으로 쓰고자 하는 글은 내가 캄보디아에서 일 년 동안 생활하면서 느꼈던 것들에 대한 것이다. 당시 나는 일기 형식으로나마 캄보디아 생활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것이 더운 나라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게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기록들을 들춰가며 다시 정리를 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주제별로 나누어서 캄보디아의 역사와 문화, 수업과 각종 행사, 캄보디아에서 보낸 일상 그리고 소풍으로 나누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더운 캄보디아에서 보낸 일 년의 시간과 그 시간을 함께한 많은 사람들을 더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글이 캄보디아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내가 만난 사람들, 내가 보낸 시간 속에 캄보디아의 단편적인 모습들이 투영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봉사활동의 의미 역시 조금씩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그 정도라도 정리가 된다면 나는 내 일 년의 시간을 더 의미 있게 기억할 것이며 아울러 그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을 더 오래 붙들어둘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글을 정리하는 지금 나는 다시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그들의 얼굴을 그린다. 그러면 그들이 내게 보낸 선한 웃음 역시 이름과 함께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진하게 느낀다. 캄보디아에서 생활하면서 가끔 읽어보았던 중용(中庸)의 한 구절을 다시 떠올려 본다. 나는 이것이 퇴임 이전과 이후, 캄보디아 생활 이전과 이후로 죽 이어지면서 다시 내게 힘을 주리라 믿고 있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있는 이 시간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영월에서 프놈펜으로
2023년 10월, 강원도 영월에 있는 글로벌인재교육원에 갔다. 3주간 진행되는 집합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파견되기 위해서는 총 5주간의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2주일은 온라인교육이고 3주간은 집합교육이다. 이 교육을 마치면 글로벌해외봉사단 160기 단원으로 캄보디아 바탐방대학교에 가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된다.
정년퇴임을 하고 난 뒤,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학교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낯선 경험이고 또 그만큼 신선한 느낌으로 나는 그 시간을 즐겼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대단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시간을 준비하는 사람들, 젊은 사람들보다 은퇴자가 훨씬 더 많을 듯한데 표정들이 밝고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 그들과 어울릴 수 있는 내가 무척이나 뿌듯했다. 특히 봉사자의 정체성 때문인지 오가며 만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 역시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그 시간, 그 만남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이번 160기 예비단원 중 최고령자는 우즈베키스탄에 파견될 예정인 컴퓨터 직종의 80세 남자분이다. 개소식 할 때 젊은 여자 선생님에 이어 인사를 했는데, 깜짝 놀랐다. 그 연세에 어떻게 마음을 냈는지, 물론 10년 전, 그러니까 70세에 코이카 봉사단의 일원으로 한 번 파견을 다녀왔다고 했지만 모든 사람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을 만큼 놀라운 일인 것은 분명했다.
영월교육원에서는 교육기간 중 3~4명이 하나의 방을 쓰도록 하고 있었는데 나는 나보다 네 살 많은 단원, 다섯 살 많은 단원과 같은 방을 썼다. 한 분은 순천에서 왔고 다른 한 분은 서울에서 왔다. 두 분 모두 일반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하셨는데 퇴직 이후 이미 봉사활동을 다녀오신 분들이다. 두 분으로부터 봉사활동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전혀 경험이 없는 내게 그분들이 해 준 이야기는 가뭄 끝에 만난 단비와 같았다. 그 분들 덕분에 나는 교육 내용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고 교육 시간에 듣지 못한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존경스러운 분들이다.
영월에 가기 전, 10월 22일의 일이었다. 시내에 나가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원래 02로 시작하는 전화는 잘 받지 않았는데 그날은 왠지 받고 싶어서 받았더니 코이카 봉사단원 선발팀이라고 하면서 캄보디아에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다. 지난 6월, 코이가 봉사단 160기에 지원을 하고 서류전형, 면접전형, 건강검진을 거치면서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내 모습을 자주 그려보았었다. 하지만 최종 발표에서 후보자로 되었다는 것을 홈페이지에서 확인을 하고 곧바로 전화를 해서 후보자가 무엇인지, 해외 봉사를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선발팀의 이야기를 듣고 인력풀에 등록을 하면서 혹시나 포기자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퇴직을 하기 2년 전, 나는 사이버 대학교에 편입을 해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퇴직자 연수 때 영월에 있는 글로벌인재교육원을 방문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는 코이카에서 진행하는 봉사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퇴직 후 해외 봉사활동을 위한 준비 역시 차근차근 했다. 그랬기에 선발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비교적 평탄했고 그래서 나로서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그만큼 설레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마음속에는 갈등이 있어 선발 과정을 거치는 시간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7년 전 팔공산 자락에 집을 짓고 살면서부터는 거의 집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집 관리를 할 수 있었다. 퇴임을 하기 전에는 주말을 이용해서 잡초를 뽑고 잔디를 깎고 또 마당을 관리하면서 부족하나마 그런대로 집이 안정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을 비운다면 집 관리를 누가 할 것인가, 아내 혼자서 다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아들 두 명이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어 급할 때는 그 아이들이 할 수도 있겠지만 집 일을 해 보지 않은 아이들을 믿고 덜렁 떠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아내가 겪을 수밖에 없는 마음고생 역시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걱정을 많이 했다. 걱정이 아니라 갈등이었겠지만, 내게는 마음 내기가 쉽지 않은 조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달리 생각해 보면 그동안 집 일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왔던 아이들이 조금은 더 주인의식을 가지고 집을 돌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스스로가 만든 위안거리일 수도 있을 것이기에 내 고민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한 시간 후에 답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 뒤 전화를 끊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사실 해외 봉사활동에 대해서는 아내가 더 관심을 가지고 내게도 먼저 이야기를 했다. 현직에 있을 때 한국어 교사 2급 자격증을 따게 독려한 것도 아내였고 늘 주변만 둘러보던 내게 시선을 넓혀 다른 세계를 보게 한 것도 아내였다. 그래서 추가로 파견 제의가 왔다고 하면 쉽게 승낙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함께 갈 수 없다는 것 때문인지, 드러내놓고 반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아내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동안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서울 선발팀에 전화를 해서 다음 날 아침 일찍 답을 줘도 괜찮겠냐 물어보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저녁 내내 고민을 하고 이야기를 해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니 답 자체가 있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였다. 힘들더라도 1년 혹은 2년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 나 스스로도 그런 문제를 남겨두고 쉬 떠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해결 과제였고 그것은 결단을 통해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겠지, 어떻게든 미안한 마음을 접고 내 스스로 삶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겠지 하는 마음만 있다면 결론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낼 수 있는 것이다. 결국은 어렵게 결론을 내리고 다음날 아침 서울로 전화를 했다. 캄보디아에 한국어교사로 가겠노라고.
그때부터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집합교육에 앞서 2주간 진행된 온라인 교육을 마쳐 가고 있는 시점인데 나는 이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집합 교육을 할 때 틈내서 온라인 강의를 들으면 된다고 했지만, 마음은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난감한 것은 현지어 학습이었다. 총 20강좌로 이루어져 있는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지만, 캄보디아어에 대해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자음과 각자음, 그리고 모음의 숫자가 많기도 했지만 비슷한 글꼴, 우리 눈에 낯설기만 한 글꼴들을 익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음과 모음을 결합하여 음절을 만드는 방식이 아주 다양해서 온라인 강의만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온라인 강좌 몇 편을 보다 보니 벌써 영월교육원에 입소를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10월 30일, 월요일 아침에 직접 운전을 해서 영월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11월 17일, 3주간의 집합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월에서 지낸 3주는 내게 무척이나 유익한 시간이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같이 캄보디아로 갈 동기들과는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는데 그들과 같이 만든 시간은 의미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다.
영월에서 진행된 교육은 코이카 해외 봉사 사업 현황이나 의미, 국제개발협력에 대한 이해, 인권 교육, 성인지 교육, 해외 건강 관리 등이었는데 퇴직 전 연수 시간에 들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퇴직 전에 들었던 것이 일반적인 수준의 내용이었다면 영월에서 들은 것은 더 구체적이었고 그래서 더 실감나게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봉사활동을 위해 파견되는 국가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어떤 마음으로 만나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영월에서 국내교육을 받는 동안 나는 풍물 동아리를 만들어서 같이 사물놀이 연습을 했다. 수업이 없는 주말 시간을 이용해서 라오스,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지로 떠나는 동기 단원들 여섯 명 정도와 같이 빈 강의실에서 풍물 연습을 했다. 원래 남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임지에 가면 풍물이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풍물 동아리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풍물을 쳐 본 것이 삼십여 년 전의 일이라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영월 교육원에 입소를 하기 전, 마을 통장님이 풍물패를 꾸릴 테니 나에게 지도를 해 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 같이 두어 달 연습을 하고 왔기에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영월교육원에서 국내교육을 받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파견되기까지 한 달여 남은 시간 나는 현지어를 공부하기도 하고 강의 내용을 다시 되새겨 보기도 하면서 보다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캄보디아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 무엇을 하려고 그 긴 시간, 낯선 곳에서 살아보려고 하는 것일까? 처음 지원서를 작성할 때부터 국내교육을 마칠 때까지 줄곧 생각해 온 것이지만, 확실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몇 가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만 내 머리에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했다. 우선, 봉사 그 자체에 대한 바람이다. 물론 국내에서도 다양한 봉사활동을 할 수 있지만 해외봉사라는 것은 더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들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생각, 내가 살아온 시간들에 대해 정리를 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역시 많이 들었다. 가족 동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파견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야 하고 그런 시간은 시선을 온전히 내게로 향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말이다. 그리고 낯선 문물과 사람을 만난다는 기대 역시 작은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해외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나라를 떠나 외국으로 여행을 다녀온 것이 손에 꼽을 정도라 일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만나야 하는 사람과 풍광, 문화는 내게 색다른 의미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12월 28일, 날씨는 맑았으며 겨울치고는 그리 춥지도 않았다. 나는 큰 캐리어 하나와 이민 가방 하나를 양손으로 끌고, 배낭 하나를 등에 지고 버스 터미널로 갔다.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상상하면서 긴 시간 고속도로를 달린 끝에 공항에 도착을 했고 공항에서 동기 단원들 만나 함께 비행기를 탔다. 프놈펜 공항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으로 열두 시 경,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두 시가 되었을 때였다. 공항에 마중을 나온 사무소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기념 촬영을 한 뒤 우리가 5주간 머물 호텔로 이동을 했다.
다음날 왕립프놈펜대학교(RUPP) 안에 있는 캄한협력센터(CKCC)에서 입소식을 가졌다. 소장님의 인사와 사무소 직원 소개에 이어 동기 단원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코이카 봉사활동에 대해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봉사단 활동에 참가한 사람들 중 몇몇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서였습니다. 그들은 봉사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새로운 경험을 하는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고 또 봉사단 파견의 의미를 오롯이 자신의 낯선 체험을 위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코이카 봉사단에 지원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후 생각이 바뀌어 봉사단 지원을 하게 되었고 국내교육을 받으면서 제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봉사 활동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나는 무엇을 위해 여러가지 고민을 밀어내면서까지 봉사활동을 하려고 한 것인가? 진정 봉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지원을 하고 국내교육을 받았던 것인가? 지금 당장 답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내가 봉사활동을 마칠 때쯤이면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입소식 행사 말미에 한 선배 단원이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대학생이라 하지만 우리나라 중ㆍ고등학생들처럼 순수하고 쾌활한 아이들이니 걱정하실 것은 전혀 없습니다.”
내가 바탐방대학교 한국어학과에서 활동을 한다는 것을 알고 건넨 덕담이었다. 입소식을 마치고 나와 프놈펜대학교 캠퍼스를 둘러보니 대학생임에도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캠퍼스를 걷거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학생들 모습이 보였다. 처음으로 만난 캄보디아 학생들, 느낌은 무척 좋았다.
입소식을 마치고 모두는 한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는데 음식이 나오는 순간, 그리고 음식을 먹으면서 많이 놀랐다. 전이나 두루치기 등 음식의 모양이나 맛이 한국에서 먹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캄보디아에서 생산된 재료로 만든 음식일 텐데 그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직원들 역시 대부분 캄보디아 사람들일 테고……. 물론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한국 사람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참 신선한 느낌을 주는 점심 식사였다. 해외 여행지에 있는 한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 한국 음식이라기보다는 한국식 음식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었는데 캄보디아 한식당에서 처음으로 먹은 음식은 온전한 한국 음식 같아서 앞으로 캄보디아에서 보낼 시간이 더 기대가 되기도 했다.
식사 후 캄보디아 사무소로 이동을 하여 통장을 만들었다. 은행직원이 직접 사무소로 와서 일 처리를 하는 것을 보니 코이카가 큰 고객이었던 모양이다. 이후 코디네이트와 면담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건강과 관련된 이야기를 비롯하여 현지 생활에 필요한 이야기를 듣고 또 건의를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단신부임의 원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처럼 나이가 많은 단원들이 혼자서 해외 생활을 한다고 하면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가족이 와서 도와주면 봉사활동을 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될 텐데 초청 기간이 30일로 한정되어 있는 것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내 말에 코디는 본부와 협의를 해야 하는 문제라서 당장 답을 드리기 어렵다고 했다. 나 역시 당장 답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건의를 하는 것으로 받아주시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면담을 마쳤다.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는 2024년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새해 연휴가 끝나자마자 현지적응교육을 받았다. 왕립프놈펜대학교 안에 있는 CKCC에서 진행된 현지적응교육의 대부분은 현지어 수업이었다. 현지인 여성 두 명이 번갈아가며 수업을 하는 현지어 수업은 다시 자ㆍ모음 익히기부터 시작을 했는데 나는 국내에서 현지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터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캄보디아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이 한글을 처음 배울 때 이런 막막함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처럼 어려움을 느끼는 학생이 있다면 어떻게 그 어려움을 해소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자주 들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시켜주기 위해서 사무소에서는 친절하게 현지인 튜터와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나는 현지적응교육을 시작한 뒤 맞이하는 첫 휴일부터 튜터를 만나 현지어 공부를 더 할 수 있었다.
주중에는 현지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교육을 받고 주말에는 튜터와 함께 현지어 공부를 하거나 아니면 프놈펜 시내에 있는 여러 곳을 다녔다. 현지적응교육 막바지에 단원들은 자신이 근무할 지역을 잠시 다녀왔다. OJT(On the Job Training) 행사였다. 단원들은 임지로 가기 전에 앞으로 일할 기관을 찾아가서 미리 의논을 하고 또 일 년 동안 생활할 숙소를 구했다. 나 역시 일주일 동안 바탐방 지역을 다녀왔다.
프놈펜에서 버스를 타면 다섯 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바탐방, 처음으로 차를 타고 먼 거리로 이동을 했다. 7시 45분 경 호텔을 나와 사무소 코디네이터와 직원 그리고 간호단원으로 파견되는 동기 한 명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차를 타고 이동을 하게 되었다. 가는 길, 날이 흐려 가시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산이 거의 보이지 않는 평지, 평원을 오랫동안 달렸다. 대만에서 서부 해안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나 몽골에서 차를 타고 가며 바라봤을 때처럼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언뜻 비슷한 듯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몽골 초원을 달릴 때는 민가나 건물을 거의 보지 못했지만 바탐방 가는 길, 도로변에는 마을이 죽 늘어서 있고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흰 소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몽골 초원에서는 대개 양이나 염소, 말을 많이 보았지만 이곳에서는 흰 소를 가장 많이 보았다. 대만에서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지날 때는 개 몇 마리 본 게 전부였던 것 같다.
바탐방에 도착하여 호텔에서 잠시 쉬다가 숙소를 먼저 보고 이어서 바탐방대학교로 갔다. 한국인 봉사 단원과 와타나 학부장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고 그곳에서 한국어학과 활동과 학생 모집, 활동물품 지원, 봉사단 수요 파악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바탐방 지역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봉사단원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같이 저녁 식사를 했다. 식사 장소는 호텔 꼭대기에 있는 라운지, 그곳에서는 바탐방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시를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는 강, 그리고 푸른 빛으로 도시를 감싸고 있는 나무들, 그리 높지 않은 집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리고 강 옆에 있는 공원에서 저녁 불빛 아래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춤이라기보다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한 그런 풍경 속에서 처음으로 캄보디아 바탐방 지역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잠시 바탐방의 일 년을 미리 그려보기도 했다. 다음날은 간호 단원이 근무하게 될 기관들을 둘러보고 내가 일 년 동안 살 집을 계약했다. 차야(CHHAYA)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
셋째 날, 9시 경에 바탐방대학교로 갔다. 3층 사무실에 도착했으나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리는데 옆 강의실 쪽에서 장선생님이 급하게 달려와 문을 열어주고 다시 강의실로 돌아갔다. 수업 중인 모양이다. 혼자 사무실에 남아 공간 곳곳을 둘러보고 있다니까 현지인 시간 강사인 뽄러 선생님이 도착을 하여 인사를 했다. 내 자리로 정해진 곳에 앉아 수업에 사용하고 있는 교재를 살펴보았다. 교재 1권은 한국어 자음과 모음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아마 한국어학과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처음 사용하는 교재인 것 같았다. 이전 단원이 복사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책이 깨끗하다. 한국어를 처음 접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사용되는 교재라 구태여 많은 내용을 책에 적어둘 필요는 없었으리라. 중요한 것은 가르치는 방법, 되풀이 되는 연습, 그리고 낯선 언어를 익숙하게 만드는 일, 즉 숙달의 문제일 테니까 말이다.
수업을 마치고 나온 선임 단원들과 한국어학과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해 신입생이 현재까지 17명, 외국어학부 다른 학과에 비해 비교적 많은 편이란다. 다른 학과란 영어과, 불어과, 중국어과, 태국어과를 말한다.
신입생들은 이미 지난 월요일부터 수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학교는 특이하게도 학년별로 학사 일정이 다르다. 수업을 시작하는 날, 그러니까 개강일이 다르기 때문에 마치는 날 역시 제각각이다. 1학년들이 이제 입학을 하여 수업을 시작했고, 3,4학년은 1학기 수업을 마치고 2월 초에 방학에 들어가며 2학년들은 2월 말에 학기를 마친다고 했다. 그러니까 현재 수업 중인 1학년과 3월 초, 중순에 개학을 하는 2, 3, 4학년 모두 마치는 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 이후로 이렇게 학사일정이 뒤틀렸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했지만, 아무튼 특이한 학사 일정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OJT 행사를 마치고 금요일 프놈펜으로 돌아와 현지적응교육 마지막 주에 현지어 시험을 쳤으며 그렇게 5주간의 현지적응 교육을 마치고 우리는 2월 첫날 각자의 임지로 떠났다. 나와 동기 단원 한 명은 사무소에서 준비한 차에 엄청난 짐을 싣고 바탐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