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익 학살 센터, 그리고 뚜얼슬랭 대학살 박물관
킬링필드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은 프놈펜에서 두 곳을 꼭 찾는다. 바로 청아익 학살 센터와 뚜얼슬랭 대학살 박물관이다. 청아익 학살 센터는 프놈펜 중심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고 뚜얼슬랭 대학살 박물관은 시내 중심에 있다. 어디를 먼저 가든 상관이 없다. 한 곳은 수용소로 사람들을 고문하거나 가두어 두는 곳이었고 다른 한 곳은 그들을 파묻은 매장지이기 때문이다. 프놈펜에서 현지적응교육을 받을 때 청아익 학살센터와 뚜얼슬랭 대학살 박물관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이후 한국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온 사람들과 같이 여러 번 다녀오기도 했다. 같이 교육을 받는 동기 중에는 너무나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될 것 같아 겁이 나서 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고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직시하고 싶어하는 동기도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동기들이 다 같이 가지 못하고 희망하는 사람과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청아익 학살센터였다. 주말을 이용하여 다른 단원 한 명과 같이 다녀왔다. 그곳은 프놈펜 시내에 있는 호텔에서 툭툭을 타면 도심을 벗어나 한 시간 정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도시를 벗어나 푸른 자연을 바라보면서, 또 매케한 공기가 아닌 비교적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달리는 기분은 상쾌했으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나 스스로가 아주 많이 무거워져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몸은 상쾌함을 느끼는데 마음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렇게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청아익 학살 센터, 입구에서 표를 끊고 오디오 가이드 하나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공원처럼 꾸며놓은 그곳에서 가장 중요한 곳,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추모탑이다. 추모탑에는 학살 이후 그곳에서 발굴된 유골을 모셔놓았는데 사람들은 연꽃을 바치며 당시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한다. 우리 역시 연꽃을 바치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이런 엄숙한 공간에서 사진을 찍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기억에 오래 남겨두고 싶은 욕심을 이기지 못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후 오디오의 안내에 따라 지점을 이동하면서 당시 학살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곳에 있었던 대부분의 건물은 사라지고 그 대신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도록 그림이 그려진 안내판이 있었는데 그 그림과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설명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길을 따라 이동을 하는 중간에 중국인 무덤, 아니 중국식으로 만들어진 무덤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무덤들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덤으로 추정할 수 있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절반쯤 파묻힌 묘지석에 적힌 한자를 통해 무덤의 주인이 오래 전에 이곳에 살았을 중국계 캄보디아인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천수를 다해 죽었고 또 죽은 뒤에 자신의 공간을 후손들이 이렇게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길을 따라가면서 만나는 학살의 흔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유적지 번호판을 따라 이동하면서 만난 집단 매장지에는 어김없이 사람의 유골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는 발굴을 한 사람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은 마을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골은 프놈펜 시내에 있는 뚜얼슬랭이라는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이곳으로 끌려와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뒤엉켜 묻힌 것을 발굴한 것일 테니까 말이다. 대비되는 그 모습이 이 비극적 사건을 더 비극적으로 만들었다. 가장 끔찍했던 곳은 학살나무라는 곳이다. 이곳은 아이들을 죽인 곳이라 했는데 그 나무에는 여행자들 혹은 추모자들이 팔찌를 걸어놓아 그 모습이 마치 나무에 매달아 놓은 아이의 몸부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수많은 팔찌를 걸치고 있는 나무, 얼핏 그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아름다움은 처절함이라는 말로 금방 치환이 되고 말았다.
오디오의 안내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작은 연못이 나오고 그 주변에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가 놓여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자처럼 만들어놓은 쉼터도 있다. 우리 일행도 그곳에 앉아 쉬면서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증언을 듣기도 했다. 증언의 목소리는 처절했고 그 목소리를 듣는 나는 더 절망적인 기분을 느꼈다. 자기 확신에 가득찬 이념이, 그 이념으로 무장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재앙이 될 수 있는가, 그들을 단순히 학살자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온전하게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는가, 이렇게 현장을 둘러보고 추모를 하는 것으로 그들 영혼을 위무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당시에 학살을 당한 사람들을 지켜본 가족과 친지 그리고 친구들은 지금 당시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또 무슨 힘으로 학살 이후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가, 이 추모 공간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정자에 앉아 있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참으로 많은 생각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의 고리를 끊기 위해 시선을 주변에 있는 들판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푸른 벼들이 자라고 있었고 또 과수나무 역시 푸르름을 빛내고 있었다. 멀리 하늘에는 구름이 한가하게 떠다니고 있었고 햇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마치 이곳 학살센터가 꿈속의 일인 듯, 주변 풍경은 학살이 일어나기 전의 평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일까? 어떤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면 그 일이 있기 전의 시간을 떠올리고 그래서 더 가슴 아파하는 것일까? 국가라는 거대 집단에서 일어난 일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내 마음이 더 아프기만 한 걸까?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래서인지 말이 없었다. 그저 푸른 들판을 보다가 이어지는 도시 건물들을 보는 시선이 흔들릴 뿐이었다. 이후 몇 번을 다시 그곳에 가서 같은 풍경들을 만나면서도 머리를 스치는 의문은 한결같다. 하지만 당장은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답은 학살의 시간을 함께했거나 아니면 함께한 사람의 후손으로 태어나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툭툭을 타고 시내로 들어와 뚜얼슬랭 대학살 박물관에 갔다. 뚜얼슬랭 근처에 왔을 때 골목길이 막혀 툭툭은 더이상 갈 수 없게 되었다. 툭툭 기사는 목적지가 그리 멀지 않으니 우리더러 내려서 걸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골목을 왜 막았냐고 물어보니 결혼식이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캄보디아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우리는 그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길이 막혀 갈 수 없다니 어쩔 수 있나, 툭툭 기사가 일러준 방향으로 걸어서 뚜얼슬랭 정문을 향해 갔다. 근처에 갔을 때 철조망이 담장을 두르고 있는 건물을 만날 수 있었고 그곳이 바로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박물관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캄보디아 프놈펜에 와서 이렇게 철조망을 둘러친 곳을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건물 담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니 정문이 나오고 그 안쪽에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가 있었다.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그리 넓지 않은 정원이 나타났고 그 옆으로, 그리고 그 앞으로 3층 정도 높이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수용소는 원래 학교였다. 수용소와 학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또 그만큼 야만의 시대를 떠올리기에는 적절한 조합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 시기 캄보디아가 베트남의 군수 물자 이동 통로가 된 이유로 미군에 의해 폭격을 당하고 그로 인해 미국의 지원을 받던 론놀 정부는 민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틈에 폴폿은 캄보디아 전역을 장악하고 암흑의 시간을 열어가기 시작한다. 미군의 폭격이 임박했다는 말과 함께 프놈펜에 있는 모든 사람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를 시킨다. 물론 폭격이 끝나면 다시 프놈펜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거짓말과 함께. 이렇게 한 것은 폴폿이 추구한 전 인민의 농민화와 관계가 있다. 그는 농산물을 최대로 생산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자신이 꿈꾸는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폴폿 정권은 농민을 제외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이상 국가 건설의 걸림돌로 생각하고 숙청을 하기 시작했다. 교사, 의사와 같은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론놀 정부에서 활동한 군인들이 우선적인 숙청 대상자였다. 승려 역시 공산국가 건설에 걸림돌이 된다 하여 여지없이 농촌으로 내쫓아 강제노동을 하도록 했다. 심지어 안경을 쓴 사람,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 역시 처형의 대상자가 되었다. 당연히 학교나 은행 등 근대 사회의 바탕이 되는 모든 기관들이 폐쇄되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처형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중세 시대 동남아 전체를 호령하던 캄보디아가 지금은 이렇게 최빈국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 바로 폴폿에 의해 자행된 학살 때문이라고. 그래서 캄보디아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지혜를 모두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후손에게 물려줄 사람들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가는 학교가 아이들의 웃음소리 대신 음울한 장송곡이 떠돌고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해야 할 공간이 철망으로 둘러싸인 지옥으로 바뀐 것이 그 사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당시 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미래를 그려나가던 교사와 학생이 수용소로 바뀐 이곳에서 고문을 받다가 청아익 학살 센터로 실려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먼저 왼편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1층으로 가니 교실 한 칸 만한 크기의 방에는 철제 침대가 놓여 있고 거기에는 손목과 발목을 고정시키는데 사용되는 족쇄와 그 족쇄에 연결된 긴 쇠사슬이 놓여 있었다. 아, 이렇게 사람을 철제 침대 위에 묶어놓고 고문을 했구나. 벽에 당시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있었는데 우리가 상상한 바로 그 모습이었다. 이 건물에서는 교실마다 비슷하게 고문 도구들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고문을 받고 있는 모습이 사진이나 그림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3층까지 둘러보고 나와 정원 맞은편 건물에 들어가니 1층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바로 이곳에 수용되어 고문을 당한 사람들이다. 사진이 진열된 방의 입구에는 이들에 대한 정보가 적힌 현판이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는 수용자들의 이름과 나이가 기록되어 있었다. 방마다 조금 다르긴 했지만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고 10대의 아이들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두 번째 건물을 나오니 예전에 운동장이었을 정원 가장자리에 그네와 같은 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뭐지 하면서 자세히 보니 그 역시 고문 도구다. 그곳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양팔을 뒤로 묶인 사람이 그네처럼 만들어진 나무에 매달리면 그 사람이 흘린 피가 아래에 있는 물통으로 떨어지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다가 벤치에 앉아 잠시 쉬고 있을 때 사람들이 다른 건물 뒤편으로 돌아 들어가고 또 그곳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혼자서 그곳으로 가 보니 다른 건물이 있었고 그곳 역시 당시의 아픈 시간을 담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감옥이었다. 한 평이 채 되지 않을 듯한 방이 교실마다 죽 이어져 있었다. 어떤 방은 나무로 칸막이를 했고 또 어떤 방은 벽돌로 칸막이를 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문 입구에는 쇠사슬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아마 감옥의 호실을 표시한 것이리라. 쇠사슬은 수용된 사람들을 묶어두기 위한 것일 터. 앞서 보았던 고문실이나 희생자의 사진보다, 어쩌면 그보다 더 당시의 상황이 실감나게 다가왔다.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방에서, 몸을 뒤척이기도 힘들 것 같은 그 공간에서, 어떤 곳은 창문이 없어 햇빛도 들지 않는 그 감옥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절망을 했을 것이며 또 무엇을 간절하게 빌면서 그 시간들을 버텨 냈을까? 그곳이 더 큰 절망의 구덩이기에 오히려 그보다 더 큰 희망을 가슴에 품은 것은 아니었을까?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맑고 햇살은 여전히 따가운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먹구름이 잔뜩 낀 것 같다. 그 사람들 대부분은 외국인이다. 그들은 이 공간을 둘러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에게도 이와 같은 저장된 상황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역사의 아픔을 내가 이곳에서 다시 떠올리듯 말이다. 그래도 도로를 막아놓고 결혼식을 하는 그곳에서는 밝고 환한 웃음소리와 스님의 축원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결혼식장 옆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