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탐방에서 만난 학살의 현장 1
오후에는 같은 숙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바탐방 관광에 나섰다. 바탐방에 와서 처음 하는 나들이이기도 하고 또 내가 먼저 가봐야 나중에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안내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우리가 가고자 한 곳은 프놈섬퍼 지역에 있는 ‘Killing Cave(학살동굴)’와 ‘Bat Cave(박쥐동굴)’였다. 지도상으로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한 번에 다 둘러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동선을 그렸다. 두 시에 만나 툭툭을 타고 먼저 ‘Killing Cave’로 갔다. 30분 정도 달려 산 아래 도착한 일행은 입장료 1달러씩 내고 산길 초입에서 내렸다. 입장료는 그냥 길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받았으며 따로 매표소 같은 곳은 없었다. 툭툭에서 내리기도 전에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달려들어 3달러를 주면 산 정상까지 오토바이로 올라갈 수 있다며 타기를 재촉했다. 차로 가면 10달러라고 했던가? 하도 정신없이 달려들어 그들을 피하며 지도상 거리를 보니 걸어서도 10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단다. 그래서 산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중간에 갈림길이 나오고 이정표를 따라 다시 걸어 올라가니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고 또 현지인들 역시 몇 명이 음료수 등을 팔기 위해 길가에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이정표가 없어 몇 번을 물어서 동굴 가는 길을 찾았다.
Killing Cave는 산 정상 가까이 있는 깊은 동굴이다. 폴폿이 이곳을 지배할 당시 그들은 사람들을 고문한 후 이곳으로 끌고 와서 동굴 속으로 던져버렸다고 했다. 동굴에 떨어진 사람은 바로 죽음을 맞이하거나 설령 살아 있다 해도 동굴 속에서 나올 방법이 없어 결국은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동굴 입구에 가니 내려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 있고 안내 푯말이 서 있었는데 크메르어로 되어 있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폰을 꺼내 번역기를 돌려보았으나 인터넷이 되지 않아 읽을 수 없었다. 왼쪽으로 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니 불상을 모신 작은 법당이 나오고 법당 옆에는 당시 학살을 당한 사람들의 유골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이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면서 묵념을 한 뒤 사진을 찍고 더 아래로 내려갔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동굴은 끝이 나고 다시 올라가는 길이 나왔다. 다 올라오니 우리가 내려가지 않았던 그 입구였다. 생각해 보니 푯말에는 내려가는 길과 올라오는 길을 표시해 놓은 것 같았다. 다시 밖으로 나와 학살의 모습을 담은 조형물들을 한참 바라보았다. 뜨거운 물에 술을 태워 강제로 마시게 하는 모습, 창으로 찌르는 모습, 임산부를 고문하는 모습, 가시가 달린 나무에 사람을 매단 모습 등 그 모습은 다양하면서도 처참했다. 동굴로 내려가는 길 언저리에 있는 법당에 들어가 삼배를 올리며 나의 평안과 참혹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안식을 빌었다.
다시 산길을 따라 절로 향했다. 가는 길 역시 이정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약간 헤매면서 정상 가까이에 있는 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멀리 바탐방의 평야가 내려다보였다. 왜 바탐방 지역을 캄보디아의 밥그릇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풍경이었다. 누렇게 변한 들판의 모습이 멀리, 길게 이어지고 있었는데 절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펼쳐져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절을 한바퀴 둘러보고 다시 걸어서 내려오는 길에 원숭이를 많이 만났다.
박쥐동굴 입구에 도착하니 다섯 시 정도가 되었다. 동굴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의자들이 깔려 있고 음료나 음식을 사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우리도 코코넛을 하나씩 사서 맨 앞에 자리를 잡았다. 다섯 시 반에서 여섯 시 사이에 박쥐들이 나온다기에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섯 시가 넘어도 박쥐들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옆에 자리잡은 프랑스인 부부와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그들 말로는 여섯 시 반이 넘어야 박쥐들이 나온단다. 날은 점점 어둑해지고, 그래도 박쥐들이 나오지 않아 조금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잠시 뒤 어둑해진 하늘 위로 박쥐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공터를 가득 메운 의자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모두 탄성을 내질렀다. 20여 분 박쥐들은 끝없이 동굴을 빠져나와 무리지어 날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사진에도 담고 내 마음에도 담았다. 박쥐동굴은 대량학살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프놈섬퍼 산에 같이 있어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같이 둘러보는 곳이다.
바탐방에서 만난 학살의 현장 2
점심을 먹고 난 뒤 3학년 학생 파비에게 문자를 보냈다. 3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해 두었는데 연락이 없어서였다. 3시가 될 때까지 아무 응답이 없기에 약속을 잊어버렸나 하면서 다른 일을 할까 하고 있는데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우리 집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니 공부하느라 문자를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괜찮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파비의 오토바이를 타고 킬링필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절로 향했다. Wat Samrong Knong(삼롱 크농 사원), 두어 번 가 본 절이다. 하지만 갈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사실 느낌이 달랐다는 것보다는 늘 새롭다는 말이 더 적확할 것 같다. 대상이 바뀌어서 그런 것은 아닐 테고 갈 때마다 내가, 내 마음이 달라서 그랬을 것이다.
Samrong Knong 사원은 킬링필드의 역사가 간직되어 있는 절이다. 지난번 4학년 수업을 할 때 바탐방을 중심으로 해서 선생님에게 소개하고 싶은 곳이 있으면 한글로 적어내라는 과제를 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파비가 Wat Samrong Knong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그곳이 자기의 고향이라고 했다. 내가 파비의 이야기에 끌린 것은 그곳이 킬링필드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곳이고 또 파비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 세 시에 만나 같이 온 것이다.
Wat Samrong Knong은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20여 분 정도 걸린다. 대나무찹쌀밥을 만드는 곳 가까이에 사원이 있는데 그 사원이 맞냐고 물어보니 맞다고 하면서 대나무찹쌀밥이 자기 고향에서 유명한 것이라 자랑을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그 절, 혹은 그 절 가까이 간 것은 제법 많았다. 자전거를 타고 그 절을 몇 번 지나쳐 갔으며 또 툭툭을 타고 바탐방 탐방을 할 때 빠지지 않고 그 절을 찾아가기도 했다. 절 입구에 들어서서 조금 안으로 들어가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본당 건물이 보이고 그 옆으로 다른 건물이 이어져 있다. 폴폿이 지배할 당시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수용했던 곳이라 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절 담장 바깥에 킬링필드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서 있었다. 일종의 위령탑인데 그 옆 공간이 당시 사람들을 학살한 뒤 묻었던 곳이라 했다. 위령탑 주변에는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고 또 여러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이 모두는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들이었다. 한동안 위령탑 앞에서, 혹은 위령탑을 빙 돌면서 생각에 잠겼다. 당시의 상황들이 영화처럼 실감나지는 않지만, 그래서 고요한 정물처럼 내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활동 사진이든 정지 화면이든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닐 터, 소수의 확신범들이 저지른 만행은 볼 때마다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위령탑 옆으로 연못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식수로 사용하던 곳이고 다른 하나는 수용당한 사람들이 목욕을 하던 곳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연못 모두 풀들이 많이 자라 있었고 수면 위에도 물풀이 뒤덮고 있어서 도저히 식수로 썼다거나 아니면 목욕을 했다고 믿어지지 않는 곳이었다.
위령탑에는 당시 발굴된 유골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건물 외벽으로는 당시의 참상을 알리는 그림들이 빙 돌아가면서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건물의 위쪽에는 이런 글이 달려 있었다. “THIS MONUMENT WAS FUNDED BY THE CAMBODIAN COMMUNITIES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CANADA, AUSTRALIA, NEW ZEALAND AND FRANCE”(이 기념비는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프랑스의 캄보디아 커뮤니티에서 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기념비를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해외 거주 캄보디아 사람들, 어쩌면 이들 해외 동포들은 크메르루즈의 폭정을 견디지 못하고 나라를 떠난 사람들이었거나 아니면 그들의 후손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돈을 모으고 그 돈을 이곳 캄보디아에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엄숙해지는 공간이다. 비극적인 역사는 그 자체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뒷사람들에게 전한다. 다시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의지를 담고서 말이다. 특이한 것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고등학교가 있었고 또 그 옆에 초등학교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 같으면 상상하지 못할 일, 학부모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날 법한 일이 여기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님비, 장애인 관련 시설이 들어서는 것조차 격렬하게 반대하는 극소수의 학부모들,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동네 사람들에 관한 기사가 떠오르고 지하철 화재 사고로 엄청난 인명이 희생된 뒤 그들을 추모하는 공간을 설치하는 문제로 난리법석을 떨었던 그 시간들이 다시 떠올랐다. 이곳이 불교국가이고 학살과 관련된 시설이 절 안에 설치되어 있다 하더라도 학교와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추모 시설, 혹은 잘 보존된 학살의 현장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인 것은 분명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절이 아닌 다른 어떤 곳, 가령 마을 한복판에 이러한 시설이 들어선다 해도 크게 반대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추모비 옆에는 단층 건물 두 동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박물관으로, 또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프놈펜에서 생활할 때 이미 고문과 학살의 현장을 둘러본 터라 아쉬움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대신 캄보디아 전역에서 벌어진 학살의 흔적을 내가 생활하고 있는 바탐방에서 볼 수 있어서 나는 당시의 시간을 마음에 더 담아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