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추석 명절 연휴에 두 아들이 캄보디아에 왔다. 원래는 아내가 한 달 정도 먼저 와서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두 아들이 오면 같이 여행을 한 뒤 모두가 같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계획을 하고 비행기표도 그렇게 예매를 했다. 하지만 아내가 11월에 청소년상담사 자격증 시험을 봐야 하는 관계로 오지 못하고 두 아들만 오는 것이다. 아들이 오기 전 미리 프놈펜과 시엠립에 숙소를 예약하고 한국어를 할 수 있는 가이드를 섭외해 두었다.
점심을 먹고 1시에 출발하면 되겠다 싶어 그렇게 차표를 예약했는데 오전에 버스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내가 예약한 1시 버스는 고장이 나서 운행을 할 수 없다면서 다른 시간에 이용하면 좋겠다는 전화였다. 이곳은 가끔 그런다. 정말 고장이 났는지, 아니면 승객이 적어서 큰 버스를 운행하기 부담스러워서 그런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미리 전화로 양해를 구하고 나 역시 굳이 1시에 출발하지 않아도 괜찮기에 두 시로 시간을 바꿔서 타기로 했다. 13불짜리 버스를 예약했는데 15불짜리 버스를 타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2불을 절약한 꼴이 되기도 했다.
오랜만에 프놈펜으로 간다. 6월에 프놈펜 세종학당에서 실시한 쓰기대회에 입상한 아이들 두 명 데리고 프놈펜에 갔다가 그 중 한 아이의 고향인 깜퐁스퍼까지 다녀온 이후에 처음이니 말이다. 가는 길은 여전했다. 여전히 뽀삿에서 잠시 쉬었고 또 프놈펜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다시 한 번 휴게소에 들렀다가 프놈펜으로 갔다.
프놈펜에 도착한 시간이 7시 정도, 내리니 이전에 버스를 타고 내렸던 곳이 아니었다. 버스 회사에서 사무실을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 모양이다. 건물은 아주 새 것이었고 버스를 타고 내리는 장소 또한 이전에 비해 무척이나 넓었다. 내일 시엠립 갈 때 툭툭 기사가 옮긴 곳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곤란하겠다 싶어 건물 입구 사진도 찍고 또 사무실에 들어가 명함도 챙겼다. 그런 뒤 툭툭을 타고 HM Grand Central Hotel로 향했다. 체크인을 하고 난 뒤 방에 가방을 놓아두고 밖으로 나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 일본식 식당, 현지적응교육을 받을 때 동기들과 같이 몇 번 가 본 집이다. 치킨가스 하나 시켜서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메뉴판에 있는 가격보다 더 많이 달라고 해서 내가 물어보니 물값이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분명 종업원이 물값은 무료라고 해서 마셨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그쪽도 조금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남자가 물값이 아니고 부가세가 포함된 것이라 해서 그러냐고 하면서 계산서에 적힌 금액대로 결재를 했다. 캄보디아에는 식당에 따라 물을 공짜로 주는 곳도 있고 물값을 따로 받는 곳도 있다. 그런데 나는 식당에서 밥을 사 먹을 때 공짜로 주는 물은 마시지만 따로 계산을 해야 하는 물은 가급적 마시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죽 그렇게 했다. 그리 비싸지는 않지만 괜히 돈을 주고 물을 사 먹는 것이 마땅치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아니면 한국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던 경험을 아직까지 떨쳐내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캄보디아에 와서 처음으로 계산을 하면서 따져 본 것 같다. 이전에는 음식값이 얼마든 의심하지 않고 달라는대로 계산을 했다. 가끔은 계산이 잘못된 것을 알고 같이 간 동료가 바로잡은 일도 있었는데 나는 한 번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왜 따졌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영어로 어느 정도는 소통이 가능해지니까 그렇게 따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영어도 정확하지 못해 부가세를 물값으로 오해하고 그런 해프닝을 만들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한 번쯤은 자신의 행동, 생각을 점검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한 번쯤은, 앞으로도.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다가 공항으로 가기 위해 툭툭을 탔다. 공항까지는 제법 먼 거리, 요금도 시내를 다닐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나온다. 처음에는 툭툭을 대절해서 갈까도 생각을 했더랬다. 왜냐하면 일전에 아내가 왔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 아내를 배웅하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려고 툭툭을 불렀는데 결국 내가 부른 툭툭을 만나지 못하고 비싼 돈을 들여 길가에 서 있는 툭툭을 타고 돌아왔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공항에 도착한 툭툭 기사가 내게 전화를 하고 또 자기가 있는 곳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기도 했지만 내가 그 장소로 찾아갈 수 없어서 결국은 내가 부른 툭툭을 타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두 아들이 있으니 구태여 더 많은 돈을 주고 대절을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에 툭툭을 불러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열 시 정도. 대합실에 들어가 안내판을 살펴보니 모두가 출발 시간만 알려주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공항 경비원에게 물어보니 도착하는 곳은 다른 곳이라 하면서 걸어갈 방향을 손으로 알려주었다. 경비원의 안내를 따라 앞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그곳이 입국장이었고 그곳에는 대한항공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이 안내되고 있었다. 이곳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을 만나는 곳이 건물 밖에 있다. 당연히 도착 시간을 안내하는 전광판 역시 건물 밖에 있어서 건물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아이들 나오기를 기다렸다. 가까이서 한국 남자 두 사람이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고 또 현지인 가이드인 듯한 남자와 여자가 한글 이름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대한항공이니 한국 사람이 제법 많이 타고 오는 모양이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이 아이들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점은 나는 손팻말을 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다. 아이들이 짐 찾고 나오면 열 한 시는 넘을 듯했다.
두 아이가 씩씩하게 문을 나오는 모습을 보고 얼른 가까이 가서 가볍게 포옹을 했다. 지난해 12월 28일, 한국을 떠날 때 보고 처음 보는 것이니 그 사이 아홉 달 가까이 지났다. 아이들은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았는데 둘째 아이는 나를 보고 현지인 다 된 것 같다는 농담을 했다. 그런가 하고 웃으며 대답을 하고 다시 툭툭을 불렀다. 잠시 후 툭툭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어디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때 기사가 사진을 보냈는데 둘째가 보더니 공항 주차장 맞은 편, 도로 옆에 있는 간판 같다고 하면서 그리로 가자고 했다. 아, 그렇구나. 공항에 도착해서 시내로 가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툭툭을 타고 시내로 가는구나. 그런데 나는 아내를 한국으로 보내고 돌아갈 때 입국장이 아니라 출국장 근처에서 툭툭을 불렀으니 내가 기사를 찾지 못하고 또 기사가 보낸 사진에 담겨 있는 광고판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툭툭을 타고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열한 시 반 정도, 아이들 체크인을 한 후 짐을 방에 내려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 시장할 것 같아 간단하게 요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다. 겨우 24시간 영업을 한다는 국수 전문집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가볍게 식사를 했다. 가격이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호텔 조식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짐을 꾸려 데스크로 내려와 체크아웃을 했다. 짐을 잠시 데스크에 맡기고 호텔을 나와 왕궁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동안 둘째가 거리 곳곳에서 풍겨나오는 냄새가 좀 거북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곳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낸 냄새, 대부분 음식 냄새일 테지만 처음 이곳 거리를 걷는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유쾌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를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폄하할 필요도 없다. 이 냄새가 바로 이들이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것일 테고 그것이 또 이들이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할 터이니 말이다.
일요일인데도 왕궁은 비교적 한산했다. 이번에 세 번째 찾아가는 왕궁이지만 그리 큰 감흥이 일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그저 낯선 건물들, 낯선 풍경들에 잠시 신기함을 느낄 뿐이었다. 아직은 내가 이곳 사람들의 삶과 왕궁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왕궁을 나와 메콩강을 따라 조금 걷다가 강 가에 있는 튜브 까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와 뚜얼슬랭으로 향했다. 폴폿 시절, 대규모로 사람들을 수용하고 또 고문을 했던 곳이다.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대해 아이들과 같이 느껴보기 위함이다. 원래는 청아익 학살 센터까지 갔다 오려고 했지만 추석 연휴를 이용한 짧은 방문이라 여유가 없어 가지 못하고 뚜얼슬랭만 다녀온 것이다.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 길, 이번에는 첫째가 그랩으로 택시를 불렀다. 툭툭을 타고 다니면서 매연 가득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 힘들다는 둘째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한 것이다. 가격은 툭툭에 비해 좀 비쌌지만,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택시는 역시 편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첫날 혼자서 늦은 저녁을 먹은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이 아이들, 아직 캄보디아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고 그렇다고 한국 식당으로 데려가기에는 거리가 멀었고 시간도 부족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초밥과 돈까스를 맛있게 먹었다. 나 역시 그러했다.
호텔에 가서 맡긴 짐을 찾아서 택시를 탔다. 시엠립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다. 세 시에 버스가 출발한다. 버스 정류장이 옮겨져서 기사가 이전 정류장과 혼동을 하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사진을 찍어오기도 했는데 그건 기우였다. 기사는 정확하게 우리가 말한 정류장으로 갔고 잠시 기다리다가 시엠립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둘째는 동남아 여행을 하면서 탄 버스 중에 가장 좋은 버스라며 감탄을 했다. 한국에서 만든 버스였는데 이 회사에서는 중고로 수입을 해서 운행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버스를 탈 때와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자리도 편안했다.
시엠립 가는 길, 프놈펜을 벗어나 한동안 편도 2차선을 달리던 버스는 이내 편도 1차선 도로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나도 처음 가는 길이다. 늘 바탐방에서 프놈펜, 바탐방에서 시엠립 정도 다녔기에 그러하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밖에서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비다. 차는 속도를 줄여 달렸지만 그래도 가끔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도 1차선 도로에서 트럭이나 다른 차를 추월하기 위해 맞은 편 차선으로 달릴 때가 많았기에 맨 앞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위태위태했다. 트럭 뒤에서, 작은 승용차 뒤에서 천천히 달리다가 추월하기도 하고 또 추월을 당하기도 하면서 결국은 여섯 시간이 넘게 걸려 시엠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장 예약을 한 Kullen Central Hotel로 가서 체크인을 하려는데 둘째가 가지고 온 캐리어에서 김칫국물 비슷한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예약한 방으로 올라가 캐리어를 열어보니 우려했던 일이 벌어져 있었다. 집에서 가져온 김치 포장이 약간 찢기면서 그 안에서 김칫국물이 새어 나와 캐리어 안에 있던 다른 것들에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당연히 그 안에 들어있던 아이의 옷에도 김칫국물이 묻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옷에도 김치 냄새가 배여 있었다. 난감했다. 급하게 짐을 모두 꺼내서 김칫국물이 묻은 것은 화장실 욕조에 가서 씻고 옷은 따로 분류를 하여 호텔에 세탁을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겉을 씻은 다른 반찬들은 두 방 냉장고에 나누어 넣었다. 그래도 캐리어 안에 김치 냄새가 남아 있었고 당연히 방 안은 김치 냄새로 가득차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남은 석 달 동안 내가 먹고 살아야 할 것들이기에 내게는 소중한 것이지만 이런 상황이 벌어지게 되니 아이들에게도 미안하고 애를 써서 반찬을 싸 보낸 아내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더구나 토요일 아침에 집에서 나와 일요일 밤이 된 지금까지 들고 돌아다녔으니 김칫국물이 새는 것은 고사하고 음식들이 상하지 않았는지 그게 걱정이 되었다. 김치는 작년에 담은 김장김치와 이번에 새로 담은 김치 두 종류를 보냈다고 했는데, 너무 시어서 먹지 못할 상황이 되면 아내와 아이들이 한 모든 고생이 물거품이 될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반찬을 만들어서 먹지 못하고 있는 나 역시 곤란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부랴부랴 짐 정리를 마치고 간단한 요기라도 하려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김치 냄새가 밴 둘째의 옷을 호텔 프런트에 맡기고 우산을 빌려서라도 나갈까 하다가 포기했다. 대신 호텔 안에 있는 바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할 생각으로 위치를 물어서 5층으로 올라가니 다행히 그때까지 영업을 하고 있었다.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음식과 술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모기가 극성이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바는 외부가 차단되는 룸 형식이 아니라 한 쪽이 개방되어 있는 곳이라 바깥의 모기들이 비를 피해 모두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종업원이 모기약을 주면서 뿌리라고 했지만 혹시나 하는 걱정 때문에 그곳에 더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동남아 지역의 모기는 댕기열의 주요 원인이라 하는데 나도 그렇지만 이곳에 처음 온 아이들이 모기에 물리면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그래서 물어보니 룸서비스도 가능하다고 하기에 미리 계산을 하고 음식을 내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 방 안에 들어가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종업원이 음식과 맥주를 가지고 왔다. 맥주를 마시면서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없는 동안 힘들었을 시간에 대한 위로를 하고 또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한 이야기, 이곳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여름 모기 때문인지 털이 군데군데 빠지고 또 기운을 차리지 못했던 우리집 개 마루에 대한 이야기 역시 빠지지 않았다. 12시가 넘은 시간에 아이들은 방으로 돌아가고 나 역시 씻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침 여덟 시에 호텔에서 가이드를 만나기로 했으니 늦어도 7시 반에는 아침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약속을 하고 잠을 잤는데 아이들 아침 먹으러 오는 시간이 늦다. 무척이나 피곤했던 모양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대학에서 행정직으로 근무하는 첫째는 요즘 외국인 유학생 유치를 위해, 그리고 현재 재학하고 있는 외국인 학생들 관리하는 일로 무척이나 바쁘다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둘째, 올해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둘째는 이곳에 오기 전날, 그러니까 금요일에 수시 원서를 마감했다고 했다. 수능 원서 작성을 비롯하여 수시 상담, 원서 작성까지 그 모든 과정이 만만치 않다. 특히 둘째는 올해 처음으로 3학년 담임을 맡은 터라 입시 관련 정보를 파악하는데도 많은 힘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학생들 상담하는데도 진을 많이 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 그 아이 역시 많이 피곤한 상태에서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약속한 시간에 식당으로 가서 혼자 아침을 먹고 있는데 두 아이가 들어왔다. 이곳 음식은 종류가 많지 않으나 정갈하고 맛이 있어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에게 많이 먹으란 말을 남기고 호텔 로비로 가니 여덟 시가 되지 않은 시간임에도 가이드는 벌써 도착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식사 중이라 좀 늦을 것 같다고 양해를 구하니 흔쾌히 괜찮다고 했다.
8시 30분 경에 호텔을 나와 차를 탔다. 승용차인줄 알았는데 9인승 봉고다. 현대차 스타렉스, 다행스런 일이다. 승용차에 가이드와 운전자 포함 5명이 타면 좀 복잡하겠구나 생각했는데 9인승 봉고라 자리가 넉넉했다. 더구나 한국 차다. 이곳에는 한국차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승용차는 더 그렇다. 가끔 보이는 한국 승용차는 경차인 ‘모닝’이 대부분이다. 반면에 승합차는 한국 차가 상당히 많이 보인다. 대부분 현대자동차 스타렉스다. 그리고 버스 역시 한국에서 만든 차가 많이 보였다. 한국에서 만든 트럭이나 박스카, 승합차도 가끔 볼 수 있었는데 그런 차들은 한국에서 달리던 모습 그대로인 경우가 참 많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수원에 있는 학원도 만나고 서울 어디쯤 있을 어린이집도 만난다. 드물게 이삿짐 센터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각종 사업장에서 사용하던 차를 중고차로 수입해서 그냥 달리기 때문이다.
어제 프놈펜을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내리기 시작한 비,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들기까지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다행히 아침에는 걷혀 있었다. 이곳은 지금 우기라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지만 한동안 비가 별로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많이 더웠다. 대부분 하루에 한 번, 주로 오후 시간에 소나기가 내리다가 곧 그치곤 했는데 우기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많은 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것 역시 지구온난화의 영향일 터다. 그런데도 어젯밤에는 긴 시간 많은 비가 내렸는데 다행히 아침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차로 15분 정도 달려 앙코르와트 매표소로 갔다. 외국인은 1인당 37불, 적지 않은 돈이다. 세 명 분 표를 끊어서 먼저 앙코르 톰으로 가기로 했다. 원래는 앙코르와트에 갔다가 오후에 앙코르 톰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오늘은 오후에 앙코르 톰에서 자동차 관련 행사가 있다고 한다. 캄보디아에 있는 유명한 차들이 다 모여서 거리를 질주하는 그런 행사란다. 어떤 행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냥 가이드의 말을 따라 앙코르 톰으로 먼저 갔다. 앙코르 톰은 폭이 100미터 정도 되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고 우리는 해자를 건너는 다리 앞에서 차에서 내렸다. 다리 양쪽 난간에는 큰 뱀을 안고 있는 석상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들어가는 방향에서 왼쪽은 악신(惡神), 오른쪽은 선신(善神)의 모습이란다. 사진을 찍은 뒤 걸어가면서 보니 정말로 얼굴 표정이 다른 것도 같았다. 미소를 띤 얼굴, 인상을 쓰고 있는 듯한 얼굴로 대비가 되는 그런 모습들이었다. 한참을 걸어들어가 왕궁터와 사원을 둘러보았다. 두 번째이고 역시 가이드에게 두 번째 설명을 듣고 있지만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가이드의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유물, 절에 담긴 역사, 그들의 생각,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시간에 대한 내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감탄사를 날리는 것만으로 좋긴 했다. 섬세한 조각, 웅장한 규모, 그리고 자연과 어우러진 멋진 풍경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자주 보다 보면 그들의 시간과 그 시간에 담긴 삶과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캄보디아의 미소라 불리는 바욘(Bayon) 사원의 조각들, 탑의 네 면에 어김없이 조각된 얼굴과 그 얼굴에 스며있는 미소를 보면서 캄보디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본 조각상의 미소가 우리 학생들 미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바욘 사원에서 나오는 길에 잠시 공연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슨 행사가 있는지 아리따운 여성들이 압사라 춤을 추고 있었다. 비록 연습을 하고 있는 풍경이지만 압사라춤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후 숲길을 걸어가다가 원숭이를 만났다. 그들은 사람을 겁내지 않고 아주 자유분방하게 다니고 있었다. 가이드가 사탕 하나를 꺼내 들고 원숭이를 부르니 금방 달려왔다. 가이드가 사탕을 건네주니 냉큼 받아서 손인지 앞발인지로 비닐 포장을 뜯고 사탕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다가 내가 돌 위에 얹어놓은 물을 발견하더니 잽싸게 달려와 물병을 덥썩 잡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뚜껑을 열고 물을 마신다. 개구쟁이 아이가 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신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으면서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 병을 들어 물을 마시더니 금방 다 쏟아버렸다.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물병을 제대로 잡을 수 없어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들어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마시려는 것을 보니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원숭이 입에 있던 사탕이 병 속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원숭이는 그것을 한참 쳐다보다가 병을 뒤집어서 돌에 두드렸다. 그래도 사탕이 병 속에서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병 뒤쪽, 그러니까 사탕이 들러붙어 있는 아래쪽을 이빨로 깨물었다. 그제서야 사탕이 병에서 나와 바위로 떨어졌다. 원숭이는 다시 사탕을 입에 넣고 물을 마시려는데 또 사탕이 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다시 꺼내는 원숭이, 잘못해서 사탕을 빠트린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렇게 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유전자가 원숭이와 거의 비슷하다고 하더니 그 모습을 아주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 정말 생김새도 그렇고 하는 행동도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네 개 다 발인지, 아니면 두 개는 손이고 나머지 둘은 발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 생김새는 인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원숭이들이 더 신기했고 더 오래 쳐다보게 되었다.
원숭이와 한참을 놀고 난 뒤 다시 차를 타고 따 프롬 사원 (Ta Prohm Temple)으로 갔다. 사원 입구에 내려 코코넛을 마시려 하는데 관광객을 상대하는 장사꾼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손에 캄보디아 옷을 들고 있기도 했고 또 간단한 기념품을 들고 있기도 했다. 그 중 한 명이 캄보디아 옷을 들고 내게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내가 살 마음이 없다고 손짓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자리를 슬쩍 피해 나무 그늘 밑으로 이동을 해도 그 여자는 내 뒤를 따라와 주변에 머물렀다. 순간 하나 사 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사 봐야 입지도 않을 옷, 어설픈 동정심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슬며시 돌려도 그 여자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코코넛을 마시는 동안에도 그러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관광지에서는 이런 장사꾼을 보지 못했다. 절에 들어갈 때 아주 가끔 연꽃을 사 달라고 하거나 아니면 포장된 음식을 사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먼아이떼’(괜찮아요)’ 한 마디에 그들은 더 이상 내 곁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연꽃을 내밀었다. 그런데 여기서 만난 사람은 달랐다. 관광객이 줄어들어 살기 더 힘들어져 그랬던 걸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어쨌든 조금은 편치 않은 시간이었다.
따 프롬 사원 (Ta Prohm Temple)은 인간이 만든 구조물과 자연이 공존과 파괴의 역사를 반복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곳이었다. 거대한 나무뿌리가 건물을 뒤덮고, 그로 인해 건물 일부가 파괴된 모습, 애초 이 건물들이 들어설 때 그곳에 자라던 나무들이 건물에 자리를 내주었겠지만 지금은 건물보다 더 높이 자란 나무뿌리가 건물을 압도하고 있었다. 역시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풍경이었다.
점심을 먹고 앙코르와트로 향했다. 이번 일정 중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캄보디아를 앙코르와트와 킬링필드로 기억을 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완전히 상반되는 두 이미지, 찬란한 문화와 그만큼 찬란했던 삶과, 처참한 너무나 처참한 죽음이 한 나라를 기억하는 대표적인 것이라니, 씁쓰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앙코르와트에 가는 길에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다.
“지금의 캄보디아 사람들은 폴폿 시대를, 그리고 킬링필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가이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그 당시의 일들을 떠올리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 그때 일을 입 밖에 내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아픈 역사를 간직한 사람들, 그 아픔이 그리 오래 된 것도 아닌데 지금의 캄보디아 사람들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미소가 어려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
가이드는 대답을 하지 않고 한동안 머뭇거리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 역시 다시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는 몸짓이 아닐까요?"
그럴 것이다. 누가 지난 시간의 아픔을 늘 생각하며 살겠는가. 그렇게 하고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가이드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나는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가 오전에 보았던 바욘 사원의 얼굴 조각들, 건물 사면에 하나씩 조각된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고 그걸 캄보디아의 미소라 부른다고 했다. 어쩌면 여러 천 년 이어져 온 이러한 미소가 이들 캄보디아 사람들의 내면에, 핏속에 잠재되어 있고 그것이 아프기만 한 현대의 비극적 역사를 이겨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앙코르와트로 가는 길, 비가 오는 대신 햇살이 따가웠다. 그래도 그리 빡빡하지 않은 여정이라 힘들지 않게 탐방을 할 수 있었다. 이곳에 오는 것이 두 번째, 여전히 신비롭고 여전히 경이롭다. 그 말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는 곳. 내가 캄보디아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지난 시간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면 이야기를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지금 앙코르와트에서 느낀 점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 섭섭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는 중앙탑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아주 경사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니 넓은 공간이 나타났고 그곳에 여러 부조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탑 바깥으로 멀리 보이는 앙코르와트 해자, 그리고 입구의 모습도 더 신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중앙탑에서 내려와 한 무리의 한국인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코이카 모자를 쓰고 있었다. 왈칵 반가운 마음이 들어 말을 걸어보려고 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일에 열중이어서 내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눈으로만 인사를 보내고 앙코르와트에서 나왔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길,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그래도 앙코르와트를 둘러보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차 안에서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달려 시내로 들어와 우리는 큰 마트에 갔다. 김치 담을 통을 사기 위해서였다. 간 김에 한국 소주 한 병과 과자 하나를 샀다. 내일이 추석. 비록 멀리 떠나와 있지만 아들과 함께 아침에 한국을 향해 절이라도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아침에 톤레삽 호수로 출발을 했다.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 하늘이 맑았다. 이번에 가는 톤레삽은 지난번 아내와 같이 갔던 곳과는 다른 모양인지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전날 내린 비로 길은 엉망이었고 당연히 차에는 황토물이 범벅이 되었다. 호수의 물도 많이 불어 이전에 논밭이었던 곳이 물에 잠겨 있었다. 또 배를 타고 들어가면서 물 속에 ‘네악따(부락을 지키는 정령을 모시는 곳)’ 서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건기에는 이곳이 마을의 입구 정도 되는 모양이었다. 물 속에 서 있는 네악따, 그 모습이 마치 배를 인도하는 등대와 같았다. 호수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쪽배를 타고 맹그로브 숲을 구경하기도 했다. 마침내 다다른 톤레삽 호수, 거대한 황토물이 우리가 탄 배를 어지럽게 흔들고 있었다. 배는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호수 언저리만 돌다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톤레삽 호수는 건기에는 길이가 150Km, 너비가 30Km인데 우기가 되면 그 면적은 세 배로 늘어난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가 우기였고 며칠 계속해서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에 호수의 물은 엄청나게 많아진 듯했다. 그래서 유람선을 타고서는 호수 안쪽까지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톤레삽 호수을 둘러보고 다시 시엠립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이후 아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프놈펜으로 향했고 나는 또 다른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바탐방 가는 버스를 탔다.
시엠립에는 우리가 가 본 곳 외에도 볼만한 것이 많이 있다. 쿨렌산이나 핑크 사원 같은 곳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시간이 없어 가 보지 못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지는 않는다. 이곳 캄보디아에서 보낼 시간이 아직 세 달 정도 남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