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일본의 한 시골 마을에 다케토리라는 대나무 장수와 그의 아내가 살고 있었다. 다케토리는 어느날 대나무를 베다가 텅 빈 대나무 안에서 작은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자식이 없어 쓸쓸했던 부부는 기뻐하면서 아이에게 가구야 히메(공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애지중지 길렀다.
가구야 히메는 쑥쑥 자라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되었다. 가구야 히메의 아름다움은 순식간에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지체 높은 공자들이 가구야 히메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가구야 히메는 남자들의 구애를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다섯 명의 공자들은 끈질기게 가구야 히메에게 결혼을 간청했다.
결국 가구야 히메는 자신의 요청을 들어주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었다. 가구야 히메는 꾀를 내어 다섯 공자에게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요청을 했던 것이었다. 이시즈쿠리노에게는 ‘부처님의 돌 그릇’을, 쿠라모치노에게는 ‘비래산의 가지’를, 아베노에게는 ‘불타지 않는 옷’을, 오토모노에게는 ‘용이 지닌 여의주’를 이시즈미노에게는 ‘제비의 둥지 속에 있는 보석’을 가져오라고 요청했다. 다섯 공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애초부터 구할 수 없는 전설 속의 물건들이었기 때문이다.
가구야 히메에 대한 소식은 어느새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황제 역시 가구야 히메를 만나고 싶어했지만 가구야 히메는 황제의 제안마저도 거절했다. 사람들은 가구야 히메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와 결혼해 궁궐에서 사는 것은 모든 여자들의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케토리 부부도 딸의 결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딸이 결혼해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어느 날 가구야 히메를 불러 결혼을 하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구야 히메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은 사실이 있어요. 사실 저는 사실 달나라에서 살던 달의 주민이에요. 저 하얀 달에도 이곳처럼 나라가 있고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지요. 달나라는 이곳만큼이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랍니다. 그런데 한 번은 제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그래서 달나라에서 쫓겨나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요. 바로 이곳으로 말이에요. 다행히 착한 두 분께서 쫓겨난 저를 발견해 거두어 주셨고 이렇게 잘살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이 크지요. 그런데 문제는 저의 형벌의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제 곧 저는 달나라로 돌아가야 해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쁘지만 두 분 부모님과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답니다. 달나라에 돌아가더라도 항상 하늘에서 부모님을 지켜보며 행복을 빌겠습니다.”
다케토리와 그의 아내는 가구야 히메의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이 죄를 용서받고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만 슬퍼하고 가구야 히메의 앞날을 축복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구야 히메를 흠모하는 남자들은 그녀를 그냥 놓아줄 수가 없었다. 특히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 달나라 사람들과 전쟁을 벌이더라도 가구야 히메를 놓아주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황제는 군사들을 시켜 가구야 히메의 집을 둘러싸고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게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보름달이 환하게 빛나는 밤, 하늘에서 달나라 사람들이 가구야 히메를 데리러 내려왔다. 황제는 그 모습을 보고 군사들에게 활을 쏘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달나라 사람들을 향해 마구 화살을 쏘아댔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달나라 사람들이 내뿜는 달빛에 화살이 닫자 반짝반짝 빛을 내며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넋을 놓고 그 신비한 광경을 바라보는 사이, 가구야 히메는 달나라 사람들과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때때로 모든 것이 덧없다는 생각에 휩싸입니다. 봄이 되면 피어나는 꽃가루 알레르기처럼, 허무는 주기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철학자들은 삶의 무의미를 받아들이고 강한 의지로 초월하라고 말하지만, 저로서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제 곧 달로 돌아가야 하는 숙명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면,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신들이 살아있던 옛날에는 달랐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의 옆에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속삭이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얼굴을 붉게 칠하고 네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타며 시내를 가로지르다 보면 개선장군은 스스로 신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하지요. 그래서 가장 비천한 노예로 하여금 ‘당신 역시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죽음마저도 잊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은 신도 정의도 진리도 죽였습니다. 절대적인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교체됐고, 의미는 내가 이름을 불러줄 때만 잠시 나타났다가 명멸하는 불빛이 되었습니다. 게오르크 루카치가 쓴 《소설의 이론》의 유명한 구절이 절로 떠오릅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간 셈입니다. 좋든 싫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망령과도 같은 허무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그저 허무를 어린애 달래듯 토닥이면서, 짧은 망각에 의지할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