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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튤립 Oct 01. 2021

그 여자가 그 남자를 뜯어먹었대.

서평: 구의 증명


나는 너를 먹을 거야.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뜯어먹는 이야기야."

"에이. 그런 소설은 많잖아."

"아니, 비유적인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뜯어먹는 이야기라니까."

"진짜? 징그러워."

"그런데, 다 읽고 나면, 그 여자가 왜 그 남자를 뜯어먹었는지, 이해가 돼"

"말도 안 돼!"

"진짜야. 정말 이해가 돼."


    두 번을 읽었다. 읽을수록 옮겨 적을 이야기가 많았다. 머리카락부터 주워 먹는 여자와,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남자의 시선에 눈물을 쏟았다. 「구의 증명」은 그런 책이었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단편소설집 「가슴 뛰는 소설」에서 솜사탕 같은 첫사랑을 담당했던 최진영 작가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던 도중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제목은 「구의 증명」. 200페이지도 안된다니, 두께가 꽤나 얄팍해서 금방 읽겠다 싶었다.


    책장을 넘기며 생각했다. 이 작가가 그 사람이 맞나. 몽글몽글한 마음을 손바닥에 탁, 털어내 삼키면 포도향이 가득 찰 것만 같은 글을 쓰던 사람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알사탕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기괴하다고도 느낄 수 있는 바둑돌 같은 이야기. 하얀 동그라미는 담, 검은 동그라미는 구. 양 끝에 존재하는 색깔로만 담아낼 수 있는 오랜 시간의 기록이다.


    이야기는 한 소년과 소년의 여덟 살 무렵부터 시작한다. 부모를 여의고 이모와 함께 사는 담과, 부모는 있지만 없으니만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구는 운명처럼 서로에게 끌린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뭔지도 모를 것만 같은 두 꼬마를 밤낮없이 붙어 다니게 만드는, 그런 운명.


p.32
- 넌 왜 여기 있어?
구와 내가 서로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는 의문보다 반가움이 더 짙게 묻어 있었다. 여기에 마침 네가 있어 이제야 말을 걸 수 있게 되었으니 설레고도 기뻐하는 마음이.
p.36
    담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담이와 보내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 담이 하는 것은 나도 하고 싶었고, 담이 가는 곳에는 나도 가고 싶었다. 나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채로, 누가 누구보다 더 좋은 사람이다 그런 것 없이 같이 있고 싶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지는 노을에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가는 순간을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삶이 소중해지고, 좁은 골목길에 나란히 앉아 지나가는 개미를 구경하는 일도 재밌어진다.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내 우주가 생겨나는 순간들. 구와 담도 그랬나 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도 서로뿐인.


p.64
    골목에 발로 쓰는 나의 일기는 온통 담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담은 몰랐다. 그 밤 중 단 한 번도 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 담이는 내 생각을 하지 않는가보다. 내 생각을 하지 않고 자나보다. 잠이 잘 오는가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담이 잘 자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은 두 사람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지겹도록 따라붙는 타인의 시선과, 처음으로 느껴본 행복이 부서져버리는 '사고'를 겪게 된 두 사람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서로의 손을 놓아버리고 만다. 그리고 허덕인다. 한 줌의 그리움을 쥔 채로. 전부였던 존재의 상실에.


p.59
    구와 멀어진 후에도 늘 구를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하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하고, 구도 나를 이렇게 생각할까 궁금해하고, 생각은 돌고 돌아 구를 미워하는 쪽으로 돌아서고...... 그래서 구 아닌 다른 것, 다른 사람, 학교나 공부 따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그것들이 재미없다는 생각 또한 하지 못했다. 구에 대한 생각이 서서히 옅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자,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구는 엄청나구나.
구 대신 들어온 다른 것들이 터무니없이 옅고 가벼워서 구의 밀도를 대신하지 못했다.
p.75
    오 분, 삼십 분, 한 시간이 아니라 하루 종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심지어 구와 함께 있을 때에도 구를 기다리는 기분이었고, 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내가 구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끝없이 기다린다는 뜻일까.

    

    자신의 지옥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녀를 다치게 할까 봐 담의 곁에서 홀연 듯 사라져 버린 구. 몇 년이 흐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나타난 그는 담의 일상에 스며든다. 돌고 돌아 처음 골목 끝에서 마주쳤을 때처럼. 내일 보자며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둘은 네모 반듯한 나무틀에 빈틈없이 부어 퐁실하게 구워낸 카스텔라 같은 행복을 만끽한다.


p,115
    담아. 우리를 기억해줄 사람은 없어. 우리가 우리를 기억해야 해. 스물세 살 봄의 언저리였을 것이다. 구가 일회용 카메라를 손에 쥐고 말했다. 그때 처음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네모난 종이에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이 나란히 담겼다. 그 사진을 부적처럼 가지고 다녔다.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다. 소중했다. 함께이기에 마음의 그늘이 지금보다 연했던 그 때.


   이렇게 행복하게 이야기가 끝나면 좋으련만. 그러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법. 그저 '사람'으로 존재하기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할 두 사람을, 세상은 기어코 지워버리려고 한다. 부모 때부터 끊임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빚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는 구와, 그런 구와 사는 담. 그리고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든 찾아내는, 사채업자들. 고작 스물네댓 살밖에 되지 않은 하얀 동그라미와 까만 동그라미는 발목부터 집어삼켜버리려는 현실에 무너지고 만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써도 이미 목덜미를 물어뜯겨 도망칠 수 없다. 둘은 이 세상에서 '사람'일 수 없다.


p.164
    우리는 결코 좋은 사이가 아니라고 했다. 멍청한 집착이라고 했다. 분명 더 큰 불행이 올 거라고 했다. 불행이 커지면 함께 있어도 외로울 것이고, 자기와 같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괴로울 것이고,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 나는 내가, 너를 좋아지게 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근데 그게 안 되잖아. 앞으로도 쭉 안될 것 같아. 

구의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구의 눈동자는 버려진 아이처럼 겁에 질려있었다. 

- 네가 있든 없든 나는 어차피 외롭고 불행해. 

    나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다시 구를 기다리며 살 자신이 없었다.


    지옥을 피해 산속으로, 산속으로 도망치는 구와 담. 필사적인 몸부림에도 결국 까만 동그라미는, 인간이길 포기하게 만드는 그들에게 잡혀가고 만다. 하얀 동그라미는 하얀색을 칠했기 때문에 하얀 동그라미인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칠하지 않아서 하얀 동그라미인 걸까. 구의 색깔이 지워진 담은 점점 바랜다.

    옅어지고 옅어져 이젠 세상에서 지워질 무렵, 구는 차갑고 짓무른 채로 담의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섧게 운다. 그리고 그를 들쳐업고, 집으로 향한다. 이제 세상에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구를 기억할 사람은, 오직 그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p.182
    나의 죽음이라면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죽어보지 않아서, 죽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안다. 지겹도록 알겠다. 차라리 내가 죽지. 내가 떠나지.

 

   정말 이상하고 기괴한 이야기. 하지만 구는 담이고, 담은 구이다. 담은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구를 잃을 수는 없다. 사라지도록 놔둘 수는 없다. 처절한 그녀의 애도를, 구가 그녀에게 원했던 일을 담은 해야 한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해도, 그것이 이 세상의 시선으론 엽기적일지라도. 사람이길 포기하는 일일지라도.

    차라리 잘 된 죽음이었다고, 답 없는 삶이었다는 말을 듣게 놔둘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받던 구를, 정말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살아내서, 기억해야 했다. 담이 구이고, 구가 담이어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무채색이지만 마음을 부서지게 만드는 문장들은 빠르게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축축해진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내가 말한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사라질 것만 같아 목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첫 장으로 돌아가 찬찬히 읽는다. '구의 증명'에 대해, 이 알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사유한다. 




그를 기억하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구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담은 구의 장례를 시작한다.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청설모가 되기 위해 들어온 이곳에서, 구가 말했다.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나를 먹을 거라는 그 말이, 전혀 끔찍하게 들리지 않았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다른 이들도 그러할까. 죽어서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다시 태어나 다른 존재로 만난 너를 내가 사랑하게 될까. 다른 존재인 나를 네가 사랑해줄까. 그 역시도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너 아닌 그 어떤 너도 상상할 수 없고, 사랑할 자신도 없다. 담아. 이 바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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