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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곱슬머리김 Nov 30. 2024

치워지는 단풍 뒤에 다소 딥했던 첫눈

당연한 줄 알았던 것들

 올해는 당연한 줄 알았던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니었다는 걸 많이 느꼈던 해였다. 지난 8월 동해 바다가 해파리들의 독 때문인지 뭔지 당최 팔다리가 따가워서 마음 놓고 물놀이를 하지 못했던 일도 그랬고, 좋아하는 파도에 흠뻑젖어 가며 뛰어놀아야 하는데 멀뚱히 애먼 모래만 뒤적이던 아이의 뒷모습에서도 그랬다.

 여느 해처럼 올여름도 어김없이, 혼자 있는 평일엔 에어컨을 켜지 않는다가 절댓값이었다. 아파트 20층 앞뒤로 산이라 한여름에도 대문만 열면 시원한 편이기도 했고 더위를 꽤 잘 견디는 편이라 그랬는데 큰 착각이었다. 종일 달궈진 모니터 두대 앞에서 몇 번을 씻어도 시원치 않았다. 냉동실의 얼음칸은 쉴 새 없이 열렸고 벌컥벌컥 들이켜는 아이스아메리카노만이 넋이 나간 정신을 겨우 붙잡아 주었었다. 올여름 에어컨이 없었다면 여름 내내 불면증에 시달렸을 거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에어컨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그 사실을 20년 만에 깨달았다. 만약에 전기가 부족해서 에어컨을 돈이 많은 사람만 쓰는 날이 오게 되면 어쩌지?

좀처럼 마음도 날씨도 종잡을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간다. 지난달 건강검진하고 나오는 길 동네 은행나무에는 노랗고 탐스러운 가을이 열렸다. 인도엔 10월의 늦여름에 미쳐 떨궈내지 못했던 청록의 시간들이 드디어 낙엽이 되어 다음을 준비한다. 가을은 두 번째 봄이랬는데, 하지만 이제는 예쁘게 물 든 단풍보다는 빛깔이 곱지 않은 잎들이 더 많은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몇 년 전부터는 단풍놀이의 시간도 이젠 도둑맞은 느낌이다. 날씨가 이상하니 곱게 물들지 못하고 타버린다. 그런 날이 잦은 거 같다.


 크기가 내 손 두 배 만한 플라타너스 나무의 낙엽들은 금세 골목길을 어지럽힌다. 떨어지기 무섭게 이어지는 비질에 가을은 닿자마자 슥슥 치워진다. 걸음마다 치이는 낙엽이 성가심으로 다가오는 일과 낙엽이불로 덮인 길에 발끝마다 닿는 나무의 표피들을 밟으며 걷는 일중에 나는 무엇을 먼저 느낄까. 방바닥에 뭐가 늘어져 있는 걸 못 보는 정리강박이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고 있지만 점점 더 얇아지는 가을에 아무렇게나 뒤죽박죽 쌓인 그 두터운 바삭함을 좀 더 느끼고 싶은 요즘이다. 모든 게 너무나 빨리 치워지고 잊히는 세상이니. 그래도 부지런히 겨울을 준비하는 손길 끝에서 진한 가을향이 난다.


여기까지 써놓고 글을 맺지 못한 채 보름이 지났다. 그 사이 초겨울 무색하게 온화하기만 했던 조카의 세번째 수능일이 지났고, 지난주 경주에서는 늘어진 여름에 식어버린 낙엽 대신 가을볕에 잘 익은 단풍맛보았다. 생각해 보니 11월 말인데 이제야 가을 같더라. 아니, 겨울은 대체 언제 오나 싶었는데, 웬걸, 기다렸냐는 듯 11월에 첫눈이 왔다. 그것도 아주 화끈하게.

 첫눈은 원래 살포시 아쉽듯 와줘야 제맛인 건데. 그래야 두 번째 눈이 기다려지고 세 번째 눈도 기다려지는 건데. 덕분에 아이 등교 30분 전에 휴교가 되었고, 1층 주차장에서 고스란히 눈자동차가 되어버린 내 차는 당분간 휴업일 예정이다. 성인이 되면서 눈 내리는 날이 늘 반갑지만은 않았지만 첫눈의 보송한 마음을 기회를 빼앗긴 거 같아 속상하다. 이번 폭설은 혹독했던 지난 더위를 보상받으려는 지구의 필연적인 조치라는데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점점 가늠하기 어렵다. 날씨의 밀당이 없어지고 있다. 나는 좀 준비가 필요한 사람인데,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진한 여름과 겨울을 거뜬히 잘 보내려면 봄과 가을을 충분히 느껴야 하는데 자꾸만 흐려지는 거 같아 아쉽고 힘들다.


 당연한 줄 알았던 것들, 그래서 못 느끼고 있던 일들을 조금씩 의식하게 된다. 한동안은 좀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면 모른채하지 않고 내버려두려 한다. 그러다 보면 콘크리트바닥이 아닌 흙바닥 위에 내가 살아가는 거라고 조금은 알아차리며 올 겨울을 감사히 보낼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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