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균형 찾기
어스름한 새벽, 테니스 코트에 도착했다. 잠시나마 스치는 바람이 무거운 마음을 식혀주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인조 잔디의 탄탄함과 흙냄새 섞인 부드러운 공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2대2 팀전이 시작되었다. 다들 긴장한 얼굴로 경기에 몰입했다. 내 차례가 왔다. “팡!” 소리와 함께 라켓으로 공을 때렸다. 순간 나의 모든 감각이 집중됐다.
‘이건 확실히 넘길 수 있겠다!’
자신감이 생겼다. 왼손으로 공의 위치를 잡고 어깨를 돌리면서 공이 떨어지는 궤적을 쫓았다. 라켓이 마치 연장된 내 팔처럼 느껴졌다. 공을 때리는 순간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공이 네트를 넘기자마자 코트 밖으로 훌쩍 날아가 버렸다.
‘아이고 발리(네트로 전진하여 코트 중간에서 공을 받아넘김으로써 상대방이 이를 따라 잡을 시간적 여유를 갖기 어렵게 만드는 것)로 쳐야 했는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후회할 틈도 없었다. 이미 한 점을 잃었고 같은 팀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스쳤다.
공이 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는 더 신중하게 완벽한 각도를 맞춰 치려 했다. 그러나 또다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공은 라켓 끝을 살짝 스치고 ‘탱!’ 하는 쇳소리를 내며 네트를 넘었다.
‘이번에도 실패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공은 상대 코트 깊숙이 꽂혔다.
“와우! 역전이다!” 팀원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테니스란 참으로 예측 불가능한 운동이다. 조금 전까지 실패로 느꼈던 샷이 득점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반면 완벽하게 맞췄다고 생각한 공은 허무하게 라인 밖으로 벗어나고야 만다. 점수는 엎치락뒤치락하며 긴장감이 고조됐다.
그날의 승부는 연장전까지 이어졌다. 결국 우리 팀은 두 점 차로 졌지만 후련함이 가슴 가득 채워졌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그 자체로 충분했다. 경기는 때로는 인생과도 같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이 쌓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노력의 결과가 예상과 다를지라도 그것이 주는 만족감은 값지다.
게임이 끝난 후 벤치에 앉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서영 씨, 접촉사고가 났대. 뒤에서 졸음 운전한 차가 받았나 봐.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대”
매일 아침 꾸준히 운동을 나오는 난영 언니가 걱정스러운 눈빛과 함께 안타까운 목소리로 내게 소식을 전했다.
“정말요? 많이 다치셨대요?”
나는 예상치 못한 소식에 당황한 채 조심스레 물었다.
“뒷목이랑 어깨가 아프다더라. 그래서 지금 병원에 있대”
순간, 그동안 늘 활기차게 운동하던 서영언니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테니스도 당분간 못 친다고 많이 우울해하더라. 그래도 며칠 있다 다시 돌아올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래”
난영 언니의 마지막 말은 위로하려는 듯했지만, 서영 언니의 힘든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가 얼마나 운동을 사랑하고 일상에서 활력을 찾았는지 잘 알기에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그리고 내가 겪은 사고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치 먼지처럼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한순간에 떠올라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듯했다.
그날 아침 테니스 경기를 마치고 땀을 대충 씻어낸 후 젖은 머리를 말리고 서둘러 출근길에 올랐다. 차선이 넓게 펼쳐진 사차선 도로에서 신호가 바뀌는 걸 보고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추려던 순간이었다. 졸리지도 않았는데 몸이 마치 물에 젖은 종잇장처럼 힘없이 무너지는 듯했다. 도로는 갑자기 기묘한 정적에 휩싸였고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까맣게 가라앉았다.
‘왜 이렇게 깜깜하지?’
창밖의 풍경은 보이지 않고 나만 홀로 우주에 떠 있는 것처럼 공허한 고립감이 밀려왔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때 ‘쿵!’ 하고 무언가가 내 차 앞 범퍼에 부딪쳤다. 앞에 있는 흰색 제너시스가 비상 깜빡이를 깜박이며 멈춰 있었다. 두 여성이 차에서 내렸다. 둘 다 50대쯤 되어 보였고, 운전석에서 내린 여자는 갈색 올림머리에 골프복을 입고 있었고, 조수석에서 내린 여자 역시 단발머리에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자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갈색 올림머리의 여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머나 어쩌다가 이렇게 됐어요? 차를 저쪽 갓길로 옮기세요”
그녀의 말을 듣고 당황한 나는 서둘러 제너시스 차를 따라가 갓길로 옮겼다.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빠르게 지나가는 사이 마음속에 초조함과 긴장이 더욱 짙어졌다. 갈색 머리의 여자가 다가와 자신의 차를 살펴보더니 사진을 찍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뒷목 잡고 나왔을 거예요. 뒷번호판 가운데만 조금 들어갔네요. 우리 신랑에게 전화 좀 해볼게요. 그쪽도 사진 찍어두세요”
나는 얼떨결에 사진을 찍고 그녀가 남편과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곧 그녀는 내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남편인데요. 사진을 보니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네요. 번호판 교체 비용 정도면 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는 예상 밖의 친절함을 느끼게 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는 상냥하게 대답하며 저녁에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전화기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우리니까 덤탱이 안 씌우는 거예요. 안전 운전 하세요~”
갈색 머리 여자가 말한 후 약속이 있어 가야 한다면서 서둘러 어디론가 떠났다.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영화 속 대사처럼 갈색 머리의 여자가 마지막으로 던진 한마디가 내 귓가에 맴돌았다.
“우리니까 덤탱이 안 씌우는 거예요”
그녀의 말은 나에게 운이 좋다는 듯 들렸다. 차분한 태도 덕분에 마음이 조금 놓이긴 했지만, 여전히 어딘가 불편한 감정이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다.
차에 올라 운전대를 다시 잡았을 때도 묘한 불안감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세상엔 정말 착한 사람들이 많을까? 방금 내게 친절을 베풀어준 이들이 그저 운이 좋은 예외였던 걸까?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의문이 떠올랐다.
얼마 후 그녀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상냥한 목소리였다.
“운전 조심하시고, 졸지 마세요~”
나는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혼란스러움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문득 차분한 그녀의 말투와 상냥한 태도가 인생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출근하자마자 나는 박쌤에게 사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신중히 내 얘기를 듣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다행이긴 한데 딴 말 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그 사람들 정말 친절했어요. 번호판 교체 비용만 받는다고 했다고요”
자신 있게 말하면서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아침의 상냥한 태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퇴근 후 걸려 온 전화는 나를 당황하게 했다. 아침의 친절했던 목소리와는 달리 차주 남편은 차분하지만,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차 상태를 다시 보니 번호판만 문제가 아니더군요. 윗부분도 긁혔고 다른 곳도 미세하게 손상된 부분이 있어요. 차 뽑은 지 2년도 안 됐어요. 50만 원만 주시면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보험처리 하시던지 오늘 중으로 결정하세요. 계좌번호는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동안 내 머리는 하얘졌다. 아침의 친절함이 무색할 정도로 상황은 뒤바뀌었고 박쌤의 경고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믿고 있던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50만 원까지는 현금으로 합의해도 큰 문제가 없지만, 그 이상이면 보험 처리를 하는 게 낫다고 했다. 더구나 피해자가 병원에 가면 보험 청구 금액이 커질 뿐만 아니라 내 보험료까지 오를 위험이 있다고 했다.
고민 끝에 나는 결국 50만 원을 이체하기로 했다. 입금 명세 문자를 보내자 곧바로 ‘확인했습니다’라는 짧은 건조한 답장이 돌아왔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후련함이 몰려왔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는 씁쓸함이 자리잡았다. 마치 내 인생이 바람 빠진 풍선마냥 축 처져버린 것 같았다.
삶은 때때로 힘껏 당겨진 활시위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풀려나듯 나를 놓아버린다. 버티고 또 버티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지며 방향을 잃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흘러간다. 그 반동은 늘 더 깊고 더 강하게 다가와 나를 흔들리게 한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온몸으로 느꼈다. 아무리 강하게 버티려 해도 인생은 늘 내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테니스 경기처럼 승패는 언제나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며 때로는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공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오르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날의 사고는 나에게 단순한 사건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테니스에서 공의 불규칙한 궤적을 읽고 다시 자세를 잡아내는 것처럼 인생에서도 예상치 못한 충격 앞에서 잠시 흔들릴지라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조용히 바람이 빠져버린 풍선처럼 가라앉은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일어섰다.
다시 라켓을 잡고 인생이라는 궤적을 따라 크게 휘두른다. 공이 어디로 튈지 몰라도 꾸준한 노력과 유연한 대응으로 최선을 다해 새로운 삶의 균형을 찾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