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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블로프 Oct 17. 2020

1. 크로이체르 소나타

"성자의 딜레마"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족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1.

 인용구의 주인이 톨스토이라는 데에 이견을 표할 사람은 드물것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이 문장을 토대로 쌓아올린 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펭귄 출판사로부터 만들어진 이 책은 톨스토이의 단편집 4개를 수록하고 있다. 작가의 생애 초기에 쓰인 '가정의 행복'과, 그 관념을 비판하는 나머지 세 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경구는 중기에 쓰인 글로서, 작가의 삶은 그 소설을 쓰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작품들은 생동감이 넘치며 등장인물들의 몸짓에도 생기가 넘치지만, 후기 작품들의 등장인물들은 안나 카레니나가 깔려 죽은 기차를 끌고다니며 신음한다. 바로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낸 '정의'라는 철마이다. 언젠가 불문학을 전공한다면서 오히려 러시아 문학에 더 흥미를 가지고 있다던 한 학생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그에게 톨스토이에 대해 묻자 '위대하나 가까이 하기는 싫은 작가'라면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던 것이 떠오른다. 분명 그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같은 교훈집을 두고 톨스토이를 평하는 것이리라.


  2.

 네개의 단편들 만으로 톨스토이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그 사이에 끼워 넣어야 어느정도 그의 사상적 변화가 설명이 된다. 이러한 배경없이 작품만을 맞이한다면 우리 불쌍한 독자들은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작가가 다만 기괴하게 다가올 따름이다. 만약 첫 작품의 주인공 마샤가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 세르게이를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세르게이는 자신의 남은 손가락들을 모조리 도끼로 찍어버릴 것이며, 마샤는 공포에 질려 달아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한 기차에 들어선다면, 그러나 운나쁘게 그녀가 들어선 곳이 '크로이체르 소나타'라면, 그녀는 머지않아 칼에 찔린 채 피투성이로 발견되리라. 남편의 뻔뻔한 저주는 덤으로. 


 만약 내가 이 책을 고등학교 시절 읽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집만 읽고 만났다면 이러한 곡조의 변화가 당황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길 잃은 이브의 딸이 아담의 아들에게 돌아와 참된 행복을 찾는다는 진부한 내용의 잠언집이 후기 작품들의 등장인물들에 의해 갈갈이 난도질당한다. 그 뒤 작가는 남녀의 관계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그러나 마찬가지로 지루하기 짝이없는 주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테면 가난한 육신에 풍족한 정신이 깃든다던지, 뿌린대로 거둔다던지, 셈족의 유대 철학들이 형식만 바꿔서 되풀이된다. 그러다가 어느 기차역에서 쓰러져 죽어버린 작가를 보며 우리 독자들은 저 고리타분한 목사님으로부터 풀려났다며 축제를 벌인다. 그리고는 이제 톨스토이가 얼마나 한심한 작가인지 알았다면서, 도스토옙스키나 푸슈킨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물론 그 불문과 학생이 이런 판단을 내리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분명 본인보다는 많은 책을 읽었을 것이고,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니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그에게 더욱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어떻게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는 사람이 톨스토이를 그런 식으로 평가한다는 것인가?


3. 

 안나 카레니나는 알랭 들롱의 작품들에서 되풀이 된다. 영국인들은 이 문호가 발표한 소설들을 성전에 모셔두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보바리 부인'과 '채털리 부인의 연인들'도 함께 말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로렌스의 소설은 그저 안나 카레니나의 주제의식을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한데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면 그것은, 세계 2차대전을 앞두고서 만들어진 일종의 변주곡일지도 모른다. 위선이라는 가면을 치우라는 그 의식을 로렌스는 절규에 가깝게 표현해 냈다. 작품 말미에 두 작품에서 전쟁이 암시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속에서도 남주인공들은 더 나은 앞날을 기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레빈의 행복이 조건을 충족한 상태에서의 만족을 향하여 나아가는 지평선이라고 한다면, 올리버의 행복은 조건이 충족되지도 않았으면서 안개 속을 헤메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물 속으로 파고드는 돌멩이 같은 것인데, 우리에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그 돌멩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후자의 이 막연한 행복을 찾아보기 위해 우리는 세르게이 신부에게 다시 돌아올 필요가 있다.



"이렇게 산답니다. 모든 게 불편하고 불만들이 많지요. 하지만 다행히도 손자들은 건강하고 착한 아이들이랍니다. 그 덕에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러고 보니 제 말만 했네요...(중략)

'나의 꿈이 이야기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야. 내가 되어야만 했으나 되지 못한 것이 바로 파셴카야. 나는 하나님을 핑계삼아 인간을 위해 살았어. 그녀는 사람들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있는거야. 하나의 선행, 보답을 바라지 않고 주는 한 잔의 물이 사람들을 위해 내가 베풀었던 은혜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는 것이야. 하지만 거기에도 신을 섬기는 진실한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신부 세르게이 中

 이 파셴카는 후에 류드밀랴 울리츠카야의 '소네치카'와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에서 되풀이 된다. 주인공은 모두 여성으로서 자기만의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 소네치카는 러시아 문호들의 숨결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기적을 타고났으며, 메데야는 사연 많은 이들을 어머니로서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능력을 지녔다. 그러나 두 소설의 남자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레빈과 올리버와는 달리 그녀들은 어둠속에 있으면서도 방황하지 않고 또렷하게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 독자와 작가를 제외하고선 누구도 박수쳐주지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세상속에서 그녀들은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이다. 이들은 파셴카의 후예들이다.


4.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을 다시 살펴보자. 첫째 소설이 관계의 형성과 위기,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서술하고 있다면 뒤의 두 소설은 이 극복이 허상이라고 밝혀내며, 그로부터 귀결되는 존재의 파멸을 다루고 있다. 전자가 객체의, 그리고 후자가 주체의 파멸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한참 동안 갖가지 사례들을 통해 결혼을 통한 행복을 설의 및 부정한 작가는 이를 사회 전반으로 확대하기에 이른다. 세르게이 신부의 삶을 통해 작가는 처음에는 세속적 삶에의 성공을 배격하고, 뒤이어 속세를 떠났다하여 자신을 높이는 행위를 비판한다 (이에 대해선 각 작품의 설명에서 다시 논하도록 하겠다). 결말에서 찾아낸 진리는 이후 기독교의 형식을 빌려 작가의 단편들에게서 되풀이된다. 작가는 이러한 배경을 통해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밝혀내려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작품만으로 해답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5. 

 톨스토이와 석가모니 부처는 많은 면에서 닮아있다. 첫째로 이 둘은 성인으로 추앙받으며, 둘째로 이 둘은 뛰어난 작가이며, 셋째로 이들이 밝혀낸 진리에 많은 이들이 감명받았고, 넷째로 그 둘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선 작가를 포함한 대부분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를 떠올릴때 보리수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아 법을 설하는 모습을 떠올리지 그로부터 10여년 전 온갖 미희들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있던 것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톨스토이에 대해서도 역시 우리는 참된 진리란 무엇일까 고뇌하는 작가를 떠올리지 집시나 하녀들과 관계하여 열세명이 넘는 사생아를 낳아놓고 자기 아내애게 내팽개친 것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설령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말년에 원숙해진 글들을 보며 그 밑거름들 중 하나라고 무책임하게 평가할 뿐이다. 그것은 석가모니의 출가 이야기가 석가모니를 주체로서 쓰였기 때문이며, 한번도 우리가 아내 소피아의 눈을 통해 톨스토이를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톨스토이와 석가모니에게 마이크를 주도록 하자. 마야부인에게도 마이크를 줘버린다면 글이 대책없이 길어져서는, 작가조차도 자기가 당최 무엇에 대하여 쓰고 있는지를 잊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가정의 행복'을 통해 톨스토이는 '사랑'이라는 관념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피력한다. 이를테면 그것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하나의 기제라는 것이다. 단편 자체의 구성은 성경과 비슷하다. 어리고 경험없는 여자가 실연의 아픔을 통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달았다는' 남자를 만난다. 남자는 한동안 이 어린 여자를 자신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이기를 망설인다. 이를테면 그는 여주인공 마샤와의 관계 형성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열거한다.  


 

"당신은 젊습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젊지 않죠. 당신은 유희를 원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유희를 만끽하십시오. 다만, 저는 상대가 아닙니다. 만일 제가 거기에 빠지게 되면, 나도 좋지 않을 것이고, 당신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겁니다.
 
가정의 행복 中



그러나 여주인공인 마샤는 계속해서 사랑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이는 A와 B의 경우를 예로 들며 주장을 펴던 남주인공에 대한 도전이다. 다시말해 비극으로 끝나버린 A와 B와는 달리, 사랑을 통해 C라는 행복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젊은 톨스토이가 '사랑'이라는 관념에 대해 밝힌 신앙고백에 해당할 것이다.



"세 번째 결말은 이런 거에요.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해놓고, 자신이 옳다고 믿고는 떠납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또 과시합니다. 제가 아니라 당신에게 농담일 테죠. 나는 첫날부터 사랑했어요. 당신을 사랑했다구요."

 가정의 행복 中


이렇게 형성된 관계는 결혼생활을 거치며 금이 가기 시작한다. 사랑을 통해 결혼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으나,



5분 후에 소냐가 카탸를 보러 위층으로 달려갔고, 마샤가 세르게이 미하일리치와 결혼할 거라고 온 집안에 소리쳤다.
 
 가정의 행복 中


그 결혼이라는 결과물이 관계에 반역을 꾀한 것이다.



'아! 바로 이게 남편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아무 잘못도 없는 여자를 모욕하고 능멸하는 것. 바로 그럴 권한이 남편에게는 있는 거야. 하지만, 나는 그에게 종속되지 않았어. 

 가정의 행복 中

방황의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가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기에 더욱 증오감을 느끼고 무서웠다. 하지만 이 순간 낯설고 혐오스러운 남자의 정열과 흥분이 내 몸안에 강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거칠고 아름다운 입술과 푸르고 가는 혈관이 드러난 반지 낀 흰 손에 몸을 맡기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내 앞에 펼쳐진, 나를 끌어당기는 이 금지된 쾌락의 심연으로 뛰어들고 싶은 강한 욕망을 느꼈다.

 가정의 행복 中

이때 결혼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로서만 남는다.



'나는 불행한 여자잖아, 더 많은 불행이 닥쳐오리라 하지 뭐,'

그는 나를 한 팔로 안고 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와 수치심이 더 많이 닥쳐오라 하지 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의 속삭이는 목소리는 남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남편과 아이의 모습이 이미 먼 옛날에 소식이 끊어진 그리운 존재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가정의 행복 中


이때 이 멀어진 관계를 봉합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은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째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내가 살 수 있도록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나요? 어쨰서 당신은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자유를 주셨나요? 도대체 저를 가르치는 것을 왜 그만두셨지요? 만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다른 방식으로 다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에요." (중략)

"더는 뭔가를 얻으려고 초조해하지 말아야 해.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됐어. 이제 우리는 한편으로 비켜나서 저 얘들한테 길을 내줘야 해."

 가정의 행복 中

 결국 남녀라는 관계의 형성으로 비롯된 모순이 아기와 그것에 대한 모성애를 통해 해결된다. 여기서 여자는 한때 방종하였으나 남편의 지도를 받고 미몽으로부터 깨어나며, 이로서 다시 화합을 이루게 된다. 


 이날부터 남편과 나의 로맨스는 끝이 났다. 예전의 감정은 귀중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추억으로 남게 되었고, 아이들과 아이들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새로운 감정이 생겨났다. 이 감정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전혀 다른 행복한 삶의 기반이 되었다.
 가정의 행복 中

 라로슈푸코나 말브랑슈의 열렬한 찬미자가 아닌 이상, 현대의 독자들에게 있어 이러한 결론은 케케묵은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연출 또한 허술한 것이여서, 책을 덮었을 때 독자는 만족감보다는 어딘가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는 이 작품이 작가의 생애 초기에 쓰인 것임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오히려 이러한 당혹감을 잘 간직한다면, 이후의 작품들에서 톨스토이의 사상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으리라. 


7.

 중간 과정에 해당하는 안나 카레니나가 수록되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펭귄 출판사의 전집들 중에 그 소설도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 톨스토이의 작품세계가 익숙치 않은 독자에겐 나머지 소설들이 후기에 쓰였음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전자에서 피력된 사상들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이 점을 숙지한다면 두번째와 세번째 단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결혼제도의 허상'이다. '가정의 행복'에서 묘사된 마샤의 방황에서 한발 나아가 톨스토이는 방황을 거부하고 가정에 헌신한 여성과, 그 방황에 휩쓸려버린 여성을 대치시킨다. 전자가 진정한 '가정의 행복'을 이룩해 낸다면 후자는 그 '가정의 행복' 이전의 관계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자기파괴에 이른다. 상기한 두 단편에 이르러서 작가는 남성 화자의 입장에서 결혼제도 자체를 배격하는데, 공교롭게도 이는 초기 작품에서 발견한 '가정의 행복으로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객체의 파멸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어느 한 기차의 승객들이 '사랑'에 대한 관념들을 이야기하며 시작된다. 이를테면 노후한 상인이 



 처음부터 못 돌아다니게 하고 단단히 혼을 냈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요. 처음부터 맘대로 하게 둬선 안 된단 말이지. 들판에 있는 말하고 집안에 있는 아내는 믿을 수 없지요."

크로이체르 소나타 中

라고 하면 '유럽의 결혼관'을 신봉하는 이들이



"구약성서에나 나올 법한 어른이에요...(중략) 저런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사랑이 없는 결혼은 결혼이 아니고, 사랑 만이 결혼을 신성하게 하고, 진정한 결혼만이 사랑을 더욱 존귀하게 한다는 점을 말이에요."

 크로이체르 소나타 中


라고 반박하는 식이다. 그러는 한편 이 모든 논의를 조롱하는 사내가 있는데, 이 남자가 바로 주인공으로서 아내를 살해한 사건의 가해자인 포즈드니셰프이다. 이 작자는 승객들이 내세운 결혼 생활과 사랑에 대한 담론들을 모두 비판한 뒤



"결혼이 사랑을 기반으로 한다고 말씀하셔 놓고, 제가 관능적인 것을 제외한 결혼의 존재를 의심했더니, 이젠 결혼의 존재로서 사랑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는군요, 결혼이란 것은 그저 속임수에 다름 아닙니다...(중략)...남편과 아내는 평생을 함께 살겠다는 외적인 의무를 받아들이고 나서 두 달째면 벌써 서로서로를 미워하게 되어, 헤어지고 싶지만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바로 여기서 알코올중독이나 권총자살 또는 서로를 죽이거나 독살하는 끔찍한 지옥이 생겨나는 겁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中

 

 정신없는 말투로 소설의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바로 결혼이 단지 위선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뒷받침이 된 자신의 경험이다. 독자들은 이제 이 사내의 진술을 듣는 데에 염증을 느낄 것인데, 그것은 그의 말이 두서가 없기는 둘째 치고 과거의 경험에 끊임없이 현실의 사상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영상으로, 그러니까 일종의 플래쉬백 장면이었으면 짜증이 덜할지는 모르겠으나 없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흑백화면으로 흐릿하게 송출될 것이며 이따금씩 끼어드는 발화자의 목소리때문에 몇차례고 일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여자와의 관계는 제 고투와 괴로움을 진정시켜 줄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책을 통해 읽기도 했습니다...(중략)의사들은 방탕이 건강을 위해 유익할 수도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올바르고 정확한 방탕의 정도를 정해 놓기까지 하는 겁니다. 저는 이런 시각을 가지고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어머니들을 알고 있습니다...(중략)동정을 잃었다는 것, 여성과의 관계가 영원히 틀어졌다는 것 때문에 울고 싶었던 겁니다. 여성과 자연스럽고 솔직한 관계를 다시는 가질 수 없다는 것 떄문이었을 겁니다. 그날 이후 여성에 대해 순수하게 대할 수 없었거든요. 바로 호색한이 되어버린 겁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中

혹은 아예 자기 사상만을 늘어놓을 때도 있다.


"남자들이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 떄문에 여자들이 그렇게 비하되어도 권력을 가지는 희한한 현상이 생기는 겁니다. 마치 유대 사람이 박해를 받는 대가로 자본을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죠...(중략)여자들은 '우리가 육욕의 대상이기만을 바라는군요. 좋아요. 그렇게 하는 대신 당신들을 노예로 만들겠어요.  
 
 크로이체르 소나타 中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일종의 암묵적인 투쟁상태로 정의내린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화두가 되는 사건을 이야기 한뒤,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자기 아내를 죽이는 결과에 이르렀는 지를 담담하게 서술한다. 냉철한 독자라면 이 남자를 이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진술이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엄연한 진실임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진실은 사회 통념상으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목적을 달성했군요. 저를 죽였으니...(중략)당신이 한 짓을 한번 봐봐.' 그녀는 문 쪽을 바라보고 말한 뒤 흐느껴 울었습니다. 문에는 처형과 아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저게 바로 당신이 한 짓이야. 저는 아이들과 멍든 아내의 얼굴을 보고 비로소 제 자신, 제 권리, 제 자존심을 잊어버리고 처음으로 아내에게서 인간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저를 모독했던 것, 저의 질투심이 모두 하찮은 것이고, 제가 저지른 짓이 너무나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녀의 팔에 얼굴을 묻고 '용서해 줘'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습니다.'

 크로이체르 소나타 中

 아이러니하게도 작품 말미에서 그는 자신이 증오해 마지않던, 그래서 증오하던 자기 아내에게서 구원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그저 자신이 허위라고 조롱하던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것은 그의 아내가 수호하며 상징한 가치였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서 작가는 써내려 가기는 커녕 오히려 포즈드니셰프와 거리를 두어버린다. 이 사내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던 톨스토이는 본작 말미에 다다라 주인공을 추한 상태로 끌여내려 놓고서는 어디론가로 숨어버린다. 오직 아내만이 곁에 남아 그 불행한 사내에게 진리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용서라고요? 모두 쓸데없는 소리야!...(중략)그래, 당신은 목적을 달성했어! 당신을 증오해!' 아내는 열이 올라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뭔가에 놀라 소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죽여, 죽이란 말이야, 난 두렵지 않아. 그냥 다 죽여, 다, 그 사람도. 나갔어, 나가 버렸어!'

 크로이체르 소나타 中


8. '악마'의 주제는 '크로이체르 소나타'와 비슷하지만 그 서술 방식은 다르다. 우선 이야기를 서술하는 주체가 작가가 아니라 주인공 예브게니 이르테네프다. 이후의 차이점을 차차 풀어보도록 하자.

 제목 '악마'는 작품에서 누굴 가리키는 것일까. 이전의 단편을 고려할 때 독자는 바로 그 이름의 주인이 예브기니라고 쉽사리 결론내릴 것이다. 혹자는 결혼 후에도 이전에 관계를 맺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스테파니다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화자가 예브기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악마의 형태는 어떤 한 인물에 국한시키기에는 꽤나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만족했다. 수치심도 처음에만 잠깐 느꼈고 나중에는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이 순탄했다. 게다가 그의 몸과 마음은 가벼워지고 평온해졌으며 활기가 생겼다. 심지어 그는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음에도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할 정도였다...(중략)이때부터 시골생활에서 가장 큰 부담이었던 부득이한 절제라는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또한 욕구를 풀지 못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ㅇ낳게 되자 예브게니는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악마 中

그러나 포즈드니셰프가 경고했던 대로 이는 일종의 저주가 된다. 성욕이란 문제를 단기책으로 풀려던 것이 장기적인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잠복기를 거친 저주는 이제 예브게니가 결혼을 할 때에 제 모습을 드러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제냐. 잘은 모르겠지만 결혼 전에 독신 시절의 모든 관계를 청산해야 한단다. 그래야 너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아내에게도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되는 거란다. 알아듣겠니?"  

어머니의 이 말은 지난 가을부터 만나지 않고 있는 스테파니다와의 관계에 대한 것임을 예브게니는 직감했다...(중략)그는 감춰야 할 어떤 일도 없고 결혼에 방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처신해 왔다고 말했다.

악마 中


결혼하고 나서도 증세는 더욱 심해진다.



그녀(스테파니다)를 알아봤다는 것뿐만 아니라, 주름이 예쁘게 진 상의와 장딴지 위로 말아 올린 붉은색 치마를 입고, 경쾌하고 힘차게 맨발로 걸어가는 그녀의 살랑거리는 몸통과 팔, 어깨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악마 中

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극복해보려고도 해보지만 결국은 모두 무용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게 헛수고였다.

그가 생각해 낸 방법 중의 하나는 계속해서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방도는 강도 높은 육체 노동과 금식이었다. 세 번째 방법은 불시에 머릿속에 닥쳐오는 예의 수치감을 또렷하게 떠올려보는 것이었다. '모두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아내와, 장모와, 사람들이.......' 그는 그 모든 것을 시도해 보았고, 자신이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다가오면, 한낮이, 예전에 밀회를 나누었던 시각이, 풀숲 뒤편에서 그녀를 보았던 시각이 다가오면, 그는 숲으로 갔다. 

악마 中


고뇌 끝에 그는 자신을 옭아매는 가정이든, 유혹하는 스테파니다든 끊어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만, 


'그럴 수는 없어. 두가지 출구밖에는 없어. 아내를 죽이든가 그녀를 죽이든가. 그리고 또...... 아아, 그래. 제3의 출구가 있다, 있어.' 그가 조용히 소리 내어 말했다. 순간 그는 전신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자살하는 거다, 그들을 죽일 필요는 없어.'

악마 中

그러나 마찬가지의 결말을 맞은 포즈드니셰프와는 달리 톨스토이는 전면에 나와 예브게니 이르테니프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담는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변호를 받음직 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실, 예브게니 이르테네프가 정신병자였다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정신병자일 것이다. 진정한 정신병자는 타인에게서 광기의 징후를 보면서, 자기 자신에게서는 똑같은 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악마 中

 이 두 작품에 대한 평론을 끝마치며 작가가 서두에 인용한 성경 문구를 적어보고자 한다. 소설을 읽기 전에, 그리고 읽은 후에 그 경구를 곱씹어 본다면, 작가가 '결혼'과 '사랑'이라는 작품에 대해 어떠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28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마태복음 19:10~12




9.


 신부 세르게이에서 작가의 사상은 퍼져나간다. 이전의 작품들에서 세속적인 면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결혼 생활'을 비판하였다면, 이 작품에서 그는 사회 전반적으로 퍼진 세속 생활의 허위성을 폭로한다. 

 주인공 세르게이는 총명하고 자긍심이 강한 청년으로서 모범적인 사관생도로 자라났다. 강직한 장교로서 자라난 그에게 유일한 흠결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재산으로, 그는 이를 다른 미덕으로 메꿔 나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한다. 



그것이 훈련이든 학업이든 일단 매달리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고 모범으로 삼을 때까지 매진했다. 하나를 이루면 그는 또 다른 일에 매달렸다. 그리하여 그는 학업에서 선두를 차지했고, 생도 시절 자신의 프랑스어 회화가 유창ㅇ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할 때까지 노력했으며, 사관학교에서 체스를 배운 후에는 결국 최고수가 되고야 말았다.

세르게이 신부 中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앙처럼,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으나 본질적인 한계를 지닌 세르게이는



그 당시 상류사회는 (개인적 견해로는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만) 네 부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 부자이면서 귀족인 사람들. 둘째, 부자는 아니지만 귀족 태생이거나 귀족 가문에서 자란 사람들. 셋째, 부자이면서 귀족 흉내를 내는 사람들, 네 번째는 부자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지만 첫번째와 두 번쨰 부류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들이다. 카사츠키(세르게이)는 당연히 마지막 두 그룹에 가까웠다. (중략)그는 이방인이었다. 그를 배려해 주면서도 그들의 태도 속에는 자기 부류와의 구분을 명확히 했다.

세르게이 신부 中


 그 상류사회에 속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를 보필하는 무관이 되거나 그 부류의 여성과 결혼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내어 약혼한 여인이 한때 황제의 정부였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그것에 대한 반항심 으로 신부가 된다. 

 '과거 그가 부러워했던 그 부류의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게 된'그는 '장교 시절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세속에서 떠나 자리하게 된 수도원 속에서도 그의 뛰어난 능력은 빛을 발해서, 우월의식 또한 떠나지 않고 남았다.  



카사츠키는 다른 사람에 대한 자신의 우월의식을 수도원에서도 느꼈다. 그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나 완벽함에 도달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세르게이 신부 中

 어느곳에서든 그의 우월의식은 따라왔다. 자신을 누구보다 낮추겠다면서 은둔한 숲속의 암자에서조차 그는 그의 청빈함에 감명받아 찾아온 신자들에 시달렸다. 그조차도 스스로 이미 성인이 되었다고 자신했으며, 이제는 신자들과 동료 성직자들이 이것 저것 자기를 위한다면서 뭔가를 해주는 통에 수도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험에 든 사내에게는 천사가 찾아온 모양이다. 과거 시골 어머니 집에서 본 어린 아이이자 자신의 소꿉친구였던 파셴카에게 그는 찾아간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그는 파셴카의 꿋꿋한 삶을 통해서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빛을 그제야 보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무명의 삶으로서, 한때 최고의 작가라고 떠받들어지던 톨스토이가 추구한 말년의 삶이기도 하다. 



시베리아에서 그는 어느 부유한 농부의 개간지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데, 주인의 채소밭에서 일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환자를 돌보며 지내고 있다. 

세르게이 신부 中


10. 

긴 글이자, 이곳에 써 올려보는 첫 독후감이다. 형식적으로 각 장에서 논한 내용들을 되풀이 하는 대신, 톨스토이의 삶을 다시 재조명함으로써 글을 끝마치고자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보리수 나무에서 도를 깨쳤으며,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자신의 참된 목소리를 찾는다. 이후의 삶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타인들에게 전하는 삶으로서, 고타마는 카스트라는 제도로서 표방된 인도의 계급을 타파하는데 힘을 썼고, 톨스토이 역시 토지 제도 아래 신음하는 농노들을 해방하는 데에 남은 여생을 보낸다. 이들은 한때 자신이 올랐던 높은 자리를 비판한다. 사회적 통념상 막연하게 좋다고 여겨지는 결혼생활 이나 재산 등을 비판하기도 한다. 능엄경에서 고타마는



모든 중생들이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모든 빛과 소리를 따르면서 생각을 쫓아 흘러 돌아서 일찍이 깨끗하고 오묘하고 항상한 성품은 깨닫지 못하여 항상한 것을 따르지 않고 나고 없어지는 것만 쫓아다니므로 이로 말미암아 세세생생에 잡념으로 흘러 돌게 되나니, 만약 나고 죽음을 버리고 참되고 항상함을 지키면 항상한 빛이 앞에 나타나서 감각기관과 그 대상 물질, 그리고 의식하는 마음이 때를 따라 없어질 것이다.

능엄경 4권


아난아, 모든 세계의 육도중생들이 그 마음에 살생할 생각이 없으면 나고 죽음이 서로 계속되는 것을 따르지 않으리라...(중략)만일 모든 비구가 동방의 무명이나 비단이나 명주와 이 땅의 가죽신이나 털옷과 우유나 그것으로 가공한 것 등을 먹거나 입지 아니하면 이러한 비구는 참답고 올바른 불자로서 묵은 빚을 갚고 삼계에 노닐지 않으리니, 어째서 그런가 하면 그 몸의 한 부분으로 이뤄진 것을 먹거나 입으면 모두가 그것들과 인연이 되나니, 마치 사람이 땅에서 생산되는 온갖 곡식을 먹기 때문에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능엄경 6권

또한 고타마는 금강경에서 설한다. 



“수보리야! 내 지금 너에게 진실한 말로 이르노니,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여기 있어, 칠보로써 그 모든 갠지스강의 모래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를 채워 보시한다고 한다면,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정말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 가운데서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니게 되어, 그것을 딴 사람들에게 잘 설명해 준다면, 이 복덕은 앞서 칠보의 복덕보다 더 크리라.”

 금강경 中

 아울러 이보다 한발짝 나아가 고타마는 수도한다면서 자신을 은근히 높이거나, 참된 도를 얻었다면서 자만하는 이들 또한 비판한다. 이는 신부 세르게이의 방황과도 궤를 같이 할 것이다. 



오래도록 분명하게 깨달아서 혼미하지 아니하면 저절로 사라지겠지만 만일 성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내게 되면 미친 마구니가 그 마음 깊숙이 들어가서 사람만 보면 자랑을 하면서 비길 데 없을 정도로 아만이 생겨나 위로는 부처님도 보이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도 보이지 않을 터이니 올바른 느낌을 잃었으므로 당연히 빠져 떨어지게 되느니라.

능엄경 9권 中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심은 곧 얻음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오니이까?”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에, 조그만큼의 법이라도 얻을 바가 있지 아니함에 이르렀음으로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능엄경 9권 中

결국 고타마도 톨스토이도 참된 자신을 찾게 되어 부처가 되었고, 대문호가 되었다. 이들의 길은 다만 자신을 등불삼아 나아간 길이 아닐까 한다. 이른바 자등명 법등명(석가가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가르침.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 이다.


 이제 그 불문과 학생에게 미처 못한 답변을 하려고 한다. 톨스토이는 분명 고타마의 불경처럼, 위대하지만 가까이 하기는 힘든 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귀를 틀어막는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의 한 지점에서, 우리는 톨스토이를 마주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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